고려시대에 백제부흥운동을 꾀한 이연년 형제
우리 지역은 천혜의 요새로 기이한 인물들과 설화가 많은 곳 중의 하나이다. 사실 설화는 그 시대 민중의식의 반영이기도 하기에 단순한 이야기로만 치부해서 될 일은 아니다.
우리 지역은 삼국시대 중반까지만 해도 백제의 지배를 받지 않고 독자적인 국가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많은 학자들은 이야기하고 있다. 영산강 유역 고분군들의 독특함과 광개토대왕비에서 수차례에 걸쳐 언급하고 있는 왜(倭)라는 국가에 대한 다양한 해석, 그리고 일본에서 발견되고 있는, 마한고분과 궤를 같이하는 전방후원형 고분 등을 볼 때 현재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우는 것처럼 도식적인 삼국시대가 이뤄졌다고 보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어떻든 이러한 부분들은 견훤의 후백제를 거쳐 고려시대에 들어 와 이연년의 백제부흥운동 등으로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데에서도 나름의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정복당해 핍박받는 설움을 겪어야만 했던 우리 지역의 민중들은 그래서 새로운 세상을 희망하며 영웅의 출현을 갈망했고 그런 결과들로 많은 설화를 만들어내기도 했으며 또한 실제로 백제부흥운동을 꾀하기도 했었다.
이연년은 고려시대 최씨 무인집권기에 원율현(지금의 금성면)에서 민란을 일으킨 인물이다. 그는 1232년(고종 19년) 원율(금성산성)에서 자신의 아우와 함께 무리를 모으고 ‘백제도원수’(百濟都元帥)라 자칭하며 거병하였다.
백제가 멸망한지 수백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이연년형제가 백제부흥을 표방하였던 것은 그만큼 백제에 대해 지역주민들이 일정한 감정을 갖고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무신정권의 가혹한 수탈에 대한 항의와 함께, 무신들의 집권으로 인해 중앙으로부터 축출된 지역 호족들의 반발로 민란이 일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농민항쟁은 신라 진성여왕 시대의 농민봉기 이래로 가장 대규모적인 것이었으며 처음에는 탐학한 지방관의 교체에서 출발하였지만 신분제도의 타파, 토지겸병 근절 등 체제개혁을 요구하며 점차 발전하여 새로운 국가건설을 표방하게 되었다. 또한 자연스레 삼국시대의 부흥운동으로 이어졌다. 삼국부흥운동은 무신정권이라는 시대적 특수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하고 국왕을 허수아비로 만들어 버린 고려왕조의 나약함과 더불어 자신들도 왕조를 부정할 수 있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는 명분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옛 백제 지역도 전주 죽동의 난, 미륵산적의 난 등 민란이 빈번한 지역이었다. 특히 몽고 침입기에 강화도로 천도한 고려왕조가 몽고방어 때문에 아무런 주의를 기울이지 못할 시기에 백제부흥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그때 이연년 형제가 원율(原栗), 담양(潭陽) 등 여러 고을의 민중들을 규합하여 해양(지금의 광주) 등 여러 주현을 함락시켰다. 이 때 왕이 파견한 토벌군 대장 김경손은 나주로 내려 왔다. 이에 이연년 형제의 민란군들은 그 소식을 듣고 나주성을 포위하였는데 그 기세가 대단히 왕성하였다. 김경손은 혜종의 어머니의 탄생지인 나주에서 민란군에게 협조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며 나주사람들을 설득하고 산신에게 제사지내며 출전하면서 한잔은 산신에게 바치고 나머지 잔은 승리하여 돌아 와 올리겠다며 승전을 다짐하고 출전하였다 한다.
그런데 이연년은 김경손을 그 휘하에 넣고자 그의 도당에게 말하기를, “지휘자는 귀주 싸움에서 공을 세운 장수이다. 인망이 대단히 높아 내가 이 사람을 생포하여 도통으로 삼고자하니 활을 쏘지마라”고 하였다. 혹시 그가 유시에 부상당할까 염려하여 활을 일체 쓰지 않고 짧은 칼로 싸웠다.
김경손은 경주사람으로, 신라왕족의 후손이었다. 그의 형 김약선은 당시 최고 집정자로 등장한 최이의 사위였다. 그리고 고종 22년 6월에 고종은 김약선의 딸을 세자비로 맞아들여 나중에 충렬왕을 낳게 된다. 무신집권기라고 하더라도 그의 집안은 신라 왕손으로 고려 지배층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집안으로서 비록 몽고와의 전쟁에서 큰 용맹을 발휘하여 구주성을 잘 지켰다고 하더라도 백제부흥의 선구자가 될 인물은 아니었다. 이로 보아 이연년은 백제부흥 못지않게 몽고를 방어하는 것도 매우 중시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연년은 나주민이 전부 그의 편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사실 김경손은 중앙군을 이끌고 올 여력조차 없어 나주에서 급히 끌어모은 30여명의 별초군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너무 방심했던 것이다. 그가 정부군의 장수 김경손을 아깝게 여겨 그가 유시에 맞을까봐 두려워하여 활을 쓰지 않고 짧은 칼로 싸우도록 한 것은 그의 자신감을 나타낸다. 오히려 이 자신감이 패배의 원인이었지만 전라도지휘사 김경손 휘하의 군대에 의해 이연년이 살해당하자, 수풀처럼 빽빽히 모여있던 반민들이 흩어졌다고 한다.
이들 대다수가 전투경험이 없는 농민들이기 때문이라 하나 사실은 이연년이 죽임을 당하자 방관자적 위치에 있던 나주사람들이 김경손을 도와 농민군을 공격했기 때문에 흩어질 수밖에 없었으리라 생각한다.
이와 함께 새 세상을 바라는 민중들의 염원은 『추성지』고지산면 고적조(古蹟條)에 용마설화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원율 사리역에 용마가 있었는데 늘 고갯마루에 숨었기 때문에 은봉이라고 불렀으며, 지금도 말이 숨은 형상이 있다. 우인과 술사가 많이 태어나니 이로 인해서 폐현을 시켰으며 옛터만 남았다.(原栗沙里驛 有龍馬 每爲隱匿於岑頭 謂之隱峰 至今有藏馬之形 羽人術士 多出於此 故仍廢縣 而遺址尙在)
원율현은 역사적으로 고려시대인 1391년(공양왕 3년) 담양 감무(監務: 고려시대 중앙정부가 속군현[屬郡縣]에 파견한 지방관)가 원율현까지 다스리게 되면서 폐현이 된 것인데, 설화는 술사가 많이 출현하여 폐현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설화에는 뛰어난 술사들이 출현하여 자신들을 구제해주기를 바라는 민중들의 염원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담양군청 사진제공@ 삼한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진 금성산성! 이곳이 이연년형제의 백제부흥운동 기병지였던 것은 아닐까 추정된다.
전통왕조시대의 민란지도자들이 보통 그러듯 이연년형제에 대해서도 남아 있는 기록이 거의 없다. 현재 파악된 것으로는 이연년의 본관은 담양의 속현인 원율현이다. 원율현 토착세력 혹은 호족의 후예쯤으로 보인다.
그런데 다음 호에서 거론하겠지만 원율현 출신으로 고려시대 중앙 고위직을 역임한 사람 중 참지정사를 역임한 문종대(1046~1083)의 이영간이라는 사람을 통해 이연년 형제를 알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둘은 같은 원율현 출신이기 때문이다.
이영간은 후백제와 관련된 지방 중소호족이었으며 고려 광종대(949~975)에 그의 집안이 중앙정계에 진출하였다. 그러나 중앙에서 착실히 성장해 가던 이영간의 가문에 시련이 닥치게 되는데 1170년에 일어난 ‘무신의 란’이 바로 그것이다. 이때 많은 귀족가문들이 몰락하여 낙향하게 되는데 이때 낙향한 이영간의 후손이 이연년의 직계조상일 것으로 보는 것이다.
보물제505호 담양 오층석탑@이규현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양식을 빼담은 담양오층석탑. 고려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어 이 또한 백제부흥운동과 연관된 것은 아닐까 추정된다.
현재 보물 제505호로 지정되어 있는 오층석탑도 백제계 양식으로 건립된 것으로 이와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화순 운주사의 와불도 백제부흥운동을 꾀하고자 했던 이연년형제의 난이 실패로 돌아가게 되면서 남겨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전우치 설화와 운주사 설화는 결국 우리 지역의 실패한 민란에 대한 민중들의 보상심리로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