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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장 녹천 고광순, 피아골의 붉은 단풍으로 지다 2

수병재 2011. 5. 23. 17:28

 

 

  육순 노구의 고광순은 오로지 충의에 의지하여 10여 년간 고군분투하였다. 그 결과 일제조차 그를 '호남의병의 선구자' 혹은 고충신(高忠臣)이라 부르며 감탄할 정도로 호남지역의 의병활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그는 1907년 9월 의병전략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즉, 일제 군경과 임기응변식의 즉흥적인 전투방식을 탈피하여 새로운 근거지를 구상하고 장기지속적인 항전태세를 갖춘다는 ‘축예지계(蓄銳之計)‘를 택한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게릴라 전술‘이라 하겠다.

녹천 고광순 의사 초상화.

고광순은 지리산을 축예지계의 적지(適地)로 판단하고 있었다. 지리산의 여러 골짜기 가운데서도 피아골은 특히 입지 조건이 좋았다. 골짜기가 깊은데다 동쪽엔 화개동, 서쪽으론 구례, 그리고 북쪽에는 문수골과 문수암 등이 자리한 천혜의 요새로서 장기전에 더없이 유리한 지형적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피아골의 중심인 연곡사에서 민간의 포수를 모집하여 의병으로 훈련시켜 강력한 일제의 군경과 맞설 만큼의 전력을 축적할 생각이었다.

이에 1907년 9월 11일 고광순을 도독으로 하고, 그 아래에 박성덕과 고제량을 도총 및 선봉으로 삼고, 신덕균, 윤영기 등을 참모로 정하는 등 편제와 전열을 재정비한 다음 천지신명께 승리를 기원하는 제사를 올리고 행군길에 올라 곡성군 구룡산 아래에 당도하였다.

진용을 강화한 고광순 의병은 지리산으로 들어가 항전할 것을 계획하고 그에 앞서 무장을 보충하기 위해 동복을 공략키로 하였다. 동복은 오래된 군현으로 효종의 아우 인평대군의 처척(妻戚)관계로 정치적으로는 얼룩진 고장이지만 보성에서 남원을 거쳐 서울로 올라가는 교통의 요지였으므로 산중 도회지였다. 북쪽 옹성산은 험준한 바위산으로 자연동굴이 많고 동쪽 운월산도 순천과 경계되어 있어 우복동(牛腹洞) 같아 점령만 하면 당분간 견딜 만한 곳이었다.

이에 고광순 의진은 9월15일 새벽에 헌병분견소를 공격했지만 일제 군경의 반격으로 도포사(都?士) 박화중(朴化中)이 전사하는 등 고전을 치러야 했다. 당시 전투상황에 대해 일제의 정보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9월 15일 오전 6시, 폭주 약 60명이 동복분파소를 습격했는데 보조원 2명이 교전했으나 중과부적이라 광주로 철수하였다. 미야가와(宮川) 보좌관은 보좌관 6병, 순검 1명을 이끌고 특무조장 1명, 병졸 7명과 협력 토벌했으나 적은 시체 한 구를 버리고 도주한 후였다.[전남폭도사]

의병은 그 길로 북쪽으로 올라가 선봉장 고광수의 집이 있는 남원군 이백면 효기리에 숙영한 다음 지리산 피아골로 들어갔다. 즉 남원에서 곡성, 광양, 구례를 거쳐 지리산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이즈음 그는 또한 지리산 부근의 영남, 호남 각지로 의병을 모집하는 소문을 연이어 발표하기도 하였다.

고광순은 지리산 연곡사를 의진 본영으로 삼고 ‘불원복(不遠復)’ 세 자를 쓴 기를 군영 앞에 세우고서 장기항전의 채비를 갖추어 갔다. 불원복은 주역 복괘의 ‘다 없어졌던 양기가 머지않아 회복된다’는 뜻으로서 ‘나라를 곧 되찾을 수 있으리라’는 강렬한 신념의 표상이라 할 수 있다.

한편 고광순 의병이 지리산에 들어올 무렵 전북 순창읍의 우편취급소 및 분파소를 김동신(金東臣) 의병이 습격하였다. 충남 회덕출신의 김동신은 휘하 의병을 거느리고 무주 덕유산과 정읍의 내장산, 그리고 장성의 백양사 등지를 주로 전전하며 기우만, 고광순 의진과 긴밀한 연계하에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 의병은 순창을 거쳐 구례군 토지면 문수골에 있는 문수암으로 들어왔다. 문수암은 고광순이 주둔한 연곡사에서 북쪽으로 산봉우리 하나를 넘어가면 나온다. 김동신 의병을 추격해 온 일제 군경은 문수암까지 이르렀으나 의병이 자취를 감춘 뒤라 화풀이로 귀중한 문화재인 문수암을 불태우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이어 일본군은 화개동으로 내려와 주둔하였다.

화개동은 연곡사에서 가까울 뿐만 아니라 영남에서 연곡사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나야 할 길목에 자리 잡고 있었다. 화개를 일제 군경이 장악하게 되면, 영남지방 의병과의 연락이 끊기게 되므로 고광순 의병이 활동하는데 여러 가지 제약이 따르게 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고광순 휘하의 윤영기와 고광수가 주축이 되어 10월 9일 화개동의 일제 군경을 기습하러 출동하였다. 그러나 일제 군경은 화개동에 집결하지 않고 쌍계사로 향하였다. 화력을 집결시킨 일제는 지리산을 무대로 활동하던 의병세력에 대해 대 탄압을 가할 심산이었다. 곧 지리산이 영?호남 의병의 활동 본거지로 변모하자, 일제 군경은 결코 이를 좌시하지 않고 대대적인 탄압작전에 돌입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 동원된 일제 군경은 진해만의 증포대대(重砲大隊)에서 파견된 소대 병력, 광주에서 출동한 1개 중대, 그리고 진주경찰서의 순경 등으로 의병 측에 비해 압도적인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1907년 10월 16일 새벽, 연곡사를 포위한 채 일제 군경은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때 최후의 순간이 다가왔음을 감지한 고광순은 부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 번 죽어 나라에 보답하는 것은 내가 평소 마음을 정한 바이다. 여러분은 나를 위해 염려하지 말고 각자 도모하라”

이에 부장 고제량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며 죽음을 함께 할 것을 맹약하였다.

“당초 의(義)로써 함께 일어섰으니, 마침내 의로써 함께 죽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죽음에 임해 어찌 혼자 살기를 바라겠는가!”

일제 군경은 총공격을 가하며 피아골을 유린한 끝에 의병들을 연곡사 구석으로 몰아갔다. 의병도 만만하게 당하지만은 않았다. 우세한 병력을 바탕으로 화승총 심지에 불을 붙여 완강히 저항한 것이다. 그러나 의병과 일제 군경의 정면대결에는 워낙 전력차가 컸다.

의병장 고광순과 부장 고제량 이하 25~26명의 의병이 연곡사 일대에서 장렬히 전사 순국하였다. 일제 군경은 고광순의 본가에 불을 질렀듯이 연곡사 안팎을 모두 불사르고 퇴각하였다. 연곡사가 다시는 의병의 근거지로서 이용될 수 없게 한 것이다. 결국 고광순의 희망이었던 '축예지계' 전략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고광순이 순국한 지 며칠이 지나서 우국시인이자 당대의 기록자인 매천(梅泉) 황현(黃玹)은 연곡사를 찾아갔다. 그는 고광순 무덤의 봉분을 돌보면서 의사의 죽음을 애도하며 다음과 같은 추모시 한편을 남겼다.

연곡의 수많은 봉우리 울창하기 그지 없네.
나라 위해 한평생 숨어 싸우다 목숨을 바쳤도다.
戰馬는 흩어져 논두렁에 누워 있고
까마귀떼만이 나무 그늘에 날아와 앉는구나
나같이 글만 아는 선비 무엇에 쓸 것인가
이름난 가문의 명성 따를 길 없네
홀로 서풍을 향해 뜨거운 눈물 흘리니
새 무덤이 국화 옆에 우뚝 솟았음이라

연곡사 교전 직후에, 어느 한 농부가 고광순과 고재량의 시신이 불에 타지 않도록 채마밭에 옮겨 솔가지로 덮어두었다. 나흘 뒤에는 고광훈이 상포(喪布)를 준비해 가지고 연곡사 터를 찾아갔다.
창평 월봉산 기슭의 고광순 의사묘.

솔가지로 덮어둔 두 의사의 시신을 절 부근에 임시로 묻고 봉분을 만들어 놓았다. 황현이 연곡사를 찾았던 것은 임시 성분(成墳)한 바로 그 다음날이었다. 이렇게 임시로 매장되어 있던 두 의사의 유해는 창평(고광순)과 화순(고제량)의 향리로 옮겨 안장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광순의 부인 오씨는 남편이 순국한 다음 해에 세상을 떠나 창평 향리 뒷산에 묻혔으며, 장자 재환은 벙어리로 3년 뒤에 죽었고, 차남 역시 장가도 들기 전에 죽었다. 그러므로 하는 수 없이 고광훈의 아들을 양자로 맞아 종가의 대통을 잇게 하였다.
고광순 의사비.

1962년 정부에서는 고광순의 이러한 공적을 기리어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엿다. 1958년에는 고광순이 산화한 연곡사 옆 서부도 근처 동백나무 숲 아래에다 순절비를 세워 오늘에 전하고 있다.

또한 불탄 그의 생가 터에는 1969년에 포의사를 세우고 한글로 된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현판을 걸었다. 그리고 포의사 앞에 건립한 사적비에는 고광순이 평소 좌우명처럼 삼았던 말을 노산 이은상이 가사체로 만들어 다음과 같이 새겨 놓았다.

義를 보고 몸을 버림은 종기에 침놓은 것 같고(見義捨身如大腫一針)
이익 따라 몸을 달림은 도둑과 같다.(見利殉身卽穿踰一轍) 하셨네.
녹치(鹿峙) 연곡(鳶谷) 님의 발자취 어느 적에 사라지리까?
그 뜻 그 이름 이 겨레 하냥 만고에 전하리다.

한편 고광순 의진의 선봉장 고광수는 당시 33세의 진사로서 천석꾼의 부자였지만 재산을 모두 의병전선에 바쳤다. 뿐만 아니라 창평의진이 머물고 간 뒤 일제 군경이 쳐들어와 집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그리고 그해 10월에는 그도 잡혀 남원감옥에 갇혔다가 탈옥하여 강원도 산골과 충청도 해변을 유랑하며 숨어 살았다. 일제하에 숨어 살면서도 의병 가족끼리 돈독한 관계를 이어갔다. 고광수의 딸은 임실의 이석용(李錫庸) 의병장의 아들과 결혼하였고 고광순의 딸은 오적암살단으로 유명한 의사 기산도(奇山度)와 혼인하였다.
창평 유천리의 녹천 고광순 의사 기념관.

현재 창평의 월봉산 기슭에는 학봉 고인후와 더불어 녹천 고광순의 묘가 나란히 모셔져 있다. 학봉은 임진왜란 때 금산전투에서 최후를 마쳤고 녹천은 지리산 피아골에서 장렬히 순국하였다. 다 같이 왜병을 상대로 한 의병장이었던 12세 조손(祖孫)이 잠든 이곳 창평 유천은 민족의 정기가 서린 성지 가운데 한 곳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