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역사이야기
고려말 사대부 야은 전녹생, 나라와 백성위한 ‘우국충정’(2)
수병재
2011. 7. 21.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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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읍 향교 입구에 세워진 삼은 선생 추모비, 야은 전녹생은 삼은 형제중 첫째이다. | |
고려시대의 대문호로 역옹패설 등을 지은 이제현은 ‘송전녹생사간안전라도’라는 시를 지어 전녹생에게 주었는데 이 시에서도 전녹생의 평소 인품을 여실히 엿볼 수 있다.
「전랑이 우리 계림의 원이 되니, 노인네들 지금까지 그 덕을 기리네
조정에 건의한 그 정성, 규혼사에 실려 있고
창 베고 잔 강개함은 종군시에 나타났네(중략)
수레타고 고삐 잡아 맑은 세상에 뜻을 두니, 남쪽의 초목도 그의 이름 알고 있네(중략)
부디 가서 공평하게 백성 고통 덜어주고 그 사실 보고하여 밝은 임금 알게 하소」
그뿐 아니다. 고려말 충신의 하나로 유명한 목은 이색도,
「군을 아는 참모들이 이리저리 모여드니,
결재하고 앉아 읊조리며 서로 잊지 못하네.
메 누에가 봄에 고치 되는 것 보길 기다리니,
비로소 순임금 옷 내린 일에 부응함이 성하다 이르겠네.」
하며 전녹생의 행적을 칭송한다.
어떻든 사대부로서 우국충정과 위민봉사의 실천을 위해 애쓰는 그의 모습은 그가 남긴 ‘직야’라는 시에 잘 나타나 있다.
玉漏丁東夜未央(옥루정동야미앙) 推枕欲起先歎息(추침욕기선탄식)
물시계 소리 깊은 밤이 아닌데 일어나려고 베개를 밀자 한숨이 먼저 나네.
同舍人人鼾如雷(동사인인한여뢰) 奈何耿耿眠不得(나하경경면부득)
곁에 잠든 동료의 숨소리는 요란한데 나는 어찌하여 잠이 오지 않나.
傷時憂國淚盈升(상시우국누영승) 感槪閒愁復幾尺(감개한수부기척)
나라 걱정과 상심으로 눈물이 고이고 여러 생각 시름이 꼬리를 물고 일어네.
嗟余不才夊尸素(차여부재쇠시소) 獨臥愧衾那安席(독와괴금나안석)
부재한 나는 시위소찬오래 하니 홀로 누워 생각할 때 잠이 편히 올 것인가.
君恩如海報無門(군은여해보무문) 暖日香芹徒謾說(난일향근도만설)
바다 같은 임의 은혜 갚을 길이 없으니 따뜻한 날 향근 부질없는 말이네.
荏苒光陰催老大(임염광음최노대) 昨日少年今白髮(작일소년금백발)
덧없는 세월이 늙기를 재촉하니 어제 젊음은 어디가고 지금은 백발인가.
出門剩見鬼揶揄(출문잉견귀야유) 萬事腐心空仰屋(만사부심공앙옥)
문을 나서면 귀신의 조롱뿐이고 이것저것 생각하다 지붕만 바라보네.
通宵强綴一篇詩(통소강철일편시) 呼燈自寫還自讀 (호등자사환일독)
밤 세워 억지로 시 한편을 지어 불을 밝혀 혼자 쓰고 읊어 보네.
조정에서 벼슬하며 숙직한 날 밤에 지은 것으로 신하된 자가 임금을 올바로 보필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이롭게 하지 않으면서 자리만 차지하여 녹만 받아먹고 있는 자신을 탓하는 시이다. 여기에 나오는 시소(尸素)라는 말은 시위소찬을 줄인 말로 요즘 말로 복지부동하는 공무원의 모습을 표현하는 뜻이다.
또한 홍건적의 난으로 인해 파천을 당해야 했던 왕을 호위하면서 나라를 걱정하는 울분을 토해내기도 한다.
暎湖樓次韻(영호루차운) (東文選 15권)
北望松都疊嶂多(북망송도첩장다) 북으로 송도 바라보니 산이 겹겹
樓高客恨轉來加(루고객한전래가) 누각이 높으니 나그네 한이 새삼 더해지네.
仲宣作賦非吾土(중선작부비오토) 중선은 부를 지어 내 땅 아니라 했거니
江令思歸未到家(강령사귀미도가) 강령은 돌아기길 생각하나 집에 정작 못 가네.
楊柳自搖愁裏線(양류자요수리선) 버들도 흔들거리고 시름 속에 잔가지를
辛夷初發亂餘花(신이초발난려화) 개나리가 피었군 난리 뒤의 첫 꽃이
弱爲江水變春酒(약위강수변춘주) 어쩌면 저 강물을 봄 술로 변하게 하여서
一洗胸中澤與査(일세흉중택여사) 가슴속에 쌓인 찌꺼기를 활활 씻어 버릴꼬
야은이 고려 말 홍건적의 난으로 공민왕을 호송하여 복주(안동)로 피난하였지만 다음해 봄이 되어 새싹이 돋아나고 꽃이 피는데 영호루에 올라서 북녘의 송도를 바라보며 돌아가지 못하는 안타까운 심정을 한수 시로 표현한 것이다.
야은은 전형적인 신흥사대부의 후예이다. 그의 부인 또한 당시의 대표적인 사대부라고 할 수 있는 농은 최해의 딸이다. 그는 조선시대 사림으로 일컬어지는 선비답게 출세하여 명예와 부만 찾는 관리가 아닌 진정한 사대부적인 성격을 평생 지니고 살았다. 그러한 그의 인품은 다음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이제 특별히 파견하는 별감을 염철별감이라고 하면 백성들이 듣고 반드시 놀랄 것이고, 한 번 새 명령이 떨어지면 아전들은 이를 빌미로 간악한 짓을 할 것이니 폐단이 여러 가지로 생길 것입니다.
별감들은 틀림없이 세포를 많이 거두어 들여 인정을 받고자 할 것이며 세포를 바쳐야 하는 고통이 이제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 만약 존무사나 안렴사로 하여금 이 일을 하게 하면 백성들이 평상적인 일로 받아들여 놀라는데 이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래도록 이렇게 해나가면서 그 공로를 고과에 반영하면 백성들이 감히 어기지 않을 것이고 반드시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하물며 영릉, 충혜왕 때에 아무데서나 세금을 거두어들이지 않은 곳이 없었으니 유독 염철별감 뿐이겠습니까?
이 방법을 한번 시도하면 다시 의논이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이제 조종의 법을 한번 따라 맑고 밝음으로서 다스린다면 의논이 여기에 이르겠습니까? 성대의 누가 될까 두렵습니다.」(논염철별감지폐소)
한편 고려말에는 특히 왜구의 침탈이 잦았다. 그러나 조정의 대처는 너무도 안이했다. 왜구가 쳐들어와서야 임시방편으로 징병을 하여 대처하니 방어가 제대로 될 리 만무한 것이다. 정규군을 제대로 갖추지 않고 징병을 통해 졸속으로 편성된 방어대를 ‘연호군’이라 불렀다. 연호는 민가에 할당하는 부역을 말하는 것인데 연호군은 그런 점에서 정규군이 아닌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야은은 수자리에 주둔한 장수들에게 토색을 당하고 아울러 연호군으로 강제 징집을 당해야만 하였던 당시 백성들의 기막힌 처지를 올바르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한 일을 살피는 것이 안렴사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만 왜구가 쳐들어오면 성을 버리고 도망가는 주둔군 장수들의 행동이 당연시 된 상황에서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고 민생보호를 최우선으로 하는 면모를 보여준 그의 사대부적인 정신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권위주위에 얽매여 민생을 도외시하는 당시의 풍토를 예리하게 지적하면서 민생보호를 자신의 사명으로 삼은 생각이 엿보이는 그의 시를 보자.
「관청사는 언덕 아래 높다랗고
높은 누각은 꼭대기를 누르고 있네
공중에 평지가 있어
더운 여름이 서늘한 가을 같구나
백성들의 힘은 원래 빌리지 않았으니
누대 이름이 과연 빈 말이 아닐세
굳이 사시의 경치를 말할 것 있나
청덕, 그 이름이 최후를 말해주네」
이 시는 청덕루를 세운 최안을의 덕을 칭송한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로 분재를 노래한 시로 알려져 있는 그의 나이 8세 때에 지었다는 분송시 또한 그의 인생관이 어릴 적부터 올바르게 잡혀져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盆 松 詩
山中三尺歲寒姿 산중삼척세한자 移托盆心亦一奇 이탁분심역일기
風送濤聲來枕細 풍송도성래침세 月牽疎影上窓遲 월견소영상창지
枝盤更得載培力 지반경득재배력 葉密曾沾雨露私 엽밀증첨우로사
他日棟樑雖未必 타일동량수미필 草堂相對好襟期 초당상대호금기
산 속의 석자나무 풍상 겪은 그 모습 화분에 옮겼더니 그 또한 기묘하네
바람은 속삭이듯 베개에 와서 닿고 가지에 가린 달은 창에 뜨기 더디어라
힘들여 가꾸기에 새 가지가 돋아나고 이슬비 흠뻑 젖어 잎마저 무성하네
동량에 재목 될지 아직은 모르지만 서당에서 마주하면 마음이 통한다네
어떻든 원나라의 통치와 무너져가는 고려말의 복잡한 시대 상황 속에서도 올바른 선비적 자세로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데 평생을 바치며 살았던 야은 선생은 불행하게도 1375년(우왕) 간관 이첨·전백영 등이 북원(北元)의 배척과 이인임의 주살을 청했다가 투옥된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 도중 장독(杖毒)으로 죽었다. 원나라의 통치에서 벗어 나 자주적인 고려를 건설하고 맑고 청렴한 사회를 만들고자 했던 그의 노력은 이렇게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후인들은 야은 선생의 정신을 높이 기리기 위해 조선조 숙종 때 장흥의 감호사(鑑湖祠)에 배향하였다.
우리 담양에 이렇게 올곧은 선비가 있었음을 이제라도 깨닫고 다시금 향교앞 삼은선생비를 어루만지며 그분이 남긴 글을 통해 시대정신을 배울 일이다. 나라와 백성을 위한 우국충정의 정신을 드높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