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역사이야기

호남 애국계몽운동의 산실, 영학숙을 설립한 고정주

수병재 2011. 8. 30. 10:00

구한말 부국강병·삼정개혁 주장, 영학숙·창흥의숙 설립해 신학문 가르쳐…창평초교 모태
제봉 고경명의 후손으로 창평 출생, 한장석의 제자
을사조약 체결에 분루 삼키며 귀향, 계몽운동 헌신
유학 바탕 신문물 도입 주장, ‘온건 개화노선’ 견지
1908년 창흥의숙 설립, 창흥학교 초대교장에 선출
한일합방, 나라잃은 설움 토하는 시·글 남기고 타계

 

고정주는 구한말의 애국계몽운동가이다. 그의 자는 보현, 호는 춘강이다. 담양 창평에서 1863년에 참봉을 지낸 아버지 고제두와 어머니 전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5세 때 큰아버지인 선공감 감역 고제승의 양자로 들어가 양부로부터 학문을 배우고 13세부터 지금의 상월정에서 열심히 공부하였다.

19세 때 한장석을 찾아 가 학문을 배웠으며 21세에는 성대영을 찾아 가르침을 받았는데 이 때 그의 학문이 높은 수준에 이르러 성대영이 높이 칭찬했다고 한다. 그의 스승인 한장석은 정치적 실천을 중요시했던 인물로 경세학을 강조하였다. 이른 바 실천하지 않는 지성은 시대의 방관자이며 무책임한 선비임을 깨달았기에 고정주는 관직에 있었던 시절이나 귀향하여 신교육운동에 몰입했던 시절에도 스승의 가르침을 깊이 새기며 실천하는 지성인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1885년에 진사에 합격하고 1891년에 문과에 합격하였다. 이 때 동생도 같이 진사에 합격하여 형제간에 금의환향하였다.
1893년 승문원 부정자로 관직을 시작하였는데 고종도 크게 관심을 보이며 제봉 고경명의 몇 대손인가를 묻고 선물을 하사했다고 한다.
1898년 종묘축관에 선출되었고, 1899년에는 홍문관 시독을 역임하고 품계가 정6품인 승훈랑에 올랐다. 그러나 이 때는 외세의 침탈과 내부의 혼란으로 나라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시기였다. 이에 고정주는 내수외양(內修外攘)을 강조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에서 그는 상벌을 명백히 하여 부패한 관리를 추방하고 재원을 모아 군사력을 증대하여 국가의 근본을 굳건하게 함으로써 외세의 침입을 물리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지만 당시 정치상황은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가 올린 상소는 재정확충과 군사력을 증대하여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이를 위한 방법으로 전정, 군정 등 삼정을 개혁하고 청나라와의 관계를 강화하여 외세의 침탈에 대응하자는 것이었다.

1900년과 1901년 연이어 모친상과 부친상을 당하여 상을 치르고 심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1903년에는 차남인 고광준을 중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1905년 홍문관 시독, 비서감랑, 예식원 상례 등을 역임하고 규장각 직각 겸 황자전독에 임명되었으며 이어서 비서감승이 되었다. 이 해에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이를 반대하는 복궐상소를 올렸다. 그 내용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조약을 맺은 부신들은 매국적입니다. 나라사람들이 모두 죽이라고 말하는데 죽일 수 없다면 어디 나라에 형정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폐하께서 종사를 위해서 죽겠다는 뜻을 견고히 지켜 강제로 조인된 조약을 인준하지 않고 조인한 적들을 엄한 규율로 다스리고 그들에게 붙은 놈들을 모두 배척하고 시무를 알고 절의가 높은 자들은 관직에 임명하길 바랍니다.」

그러나 이 상소 또한 받아들여지지 않아 크게 탄식하며 분노의 눈물을 흘리고 1906년 고향으로 돌아와 녹천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거처하면서 애국계몽운동과 신교육운동에 헌신하였다. 을사보호조약으로 나라를 잃게 될 위험에 처하자 이에 상소를 올리며 대안을 제시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 정치현실 속에서 지식인으로서 나라를 구하기 위한 다른 방안은 결국 국민들을 계몽하여 애국전선의 대열에 세우는 것이고 인재를 양성하여 나라를 구하는 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른 바 ‘동도서기론’으로 불려지는 사상적 입장을 견지한 것으로 전통적인 유학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신문물을 도입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자 하는 게 주된 내용이었다. 비록 급진적인 의병활동은 아니지만 신문물을 받아들이고 내부적 힘을 키워보자는 온건적 개화노선을 취하면서 현실에 대응하였던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어렸을 적 공부를 했던 상월정을 수리하여 영학숙을 세우고 영어 교육을 실시하였다. 중국에 유학보냈던 아들 고광준과 그의 사위인 인촌 김성수, 고하 송진우, 현준호, 김시중 등이 이때 함께 공부하였다.

지난 2008년 전남도민속자료 42호로 지정된 창평면 삼천리 춘강 고정주 고택.
1907년에는 사돈인 김경중(김성수의 부친)과 함께 호남학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초대 회장에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08년 호남학회 회장직을 그만두고 창흥의숙을 세워 신교육운동에 전념하였다. 바로 이 학교가 현재 창평초등학교의 모태가 되었다.

창흥의숙에서는 영학숙에서 공부했던 사람들과 우리나라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 등 50여 명의 학생들이 한문, 국사, 영어, 산술 등 신학문을 배웠는데 지역 유지들도 이에 관심을 갖고 뜻을 모아 창흥학교라는 공식교육기관으로 발돋움하게 되었고 고정주는 초대 교장에 선출되었다.

그는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고금에 박식하고 시의에 통달하여 큰 변화를 놓치지 않고 시대의 변화에 함께 하면서 도를 따르는 뜻에 맞출 것을 강조하고, 만약에 옛 것에 집착하여 시대의 변화를 알지 못하면 구차한 선비가 될 거라 강조하였다.

관직에 있던 시절 열강의 침탈 속에서 급변하는 세계의 정세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끝내는 나라를 내주고야 말았던 통분의 세월을 보냈던 그이기에 옛 것에만 얽매여 현실을 바로 보지 못하는 시대의 아픔을 후세들에게 더 이상 물려주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당시 상황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인재를 육성하여 열강들의 침탈 속에서 나라를 구하는 것이고 백성들을 계몽하여 국력을 회복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교육운동에 헌신하였다.

그러나 1910년 치욕의 한일합방이 조인되자 두문불출하며 나라 잃은 설움을 삼켰다. 이듬 해 육휴당(六休堂)을 짓고 모든 가사를 그 곳에 정리해 두고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나라 잃은 설움과 울분을 시와 글 속에 남기면서 살다가 1933년에 생을 마감하게 된다.

임진왜란 때 대표적 의병장인 제봉 고경명의 후손으로 선비적 삶의 전형은 무엇인가를 대를 이어 보여준 고정주! 그러한 집안의 내력이 있었기에 같은 지역, 같은 집안에서 같은 시기에 녹천 고광순 선생은 의병장으로, 춘강 고정주 선생은 교육운동으로 비록 노선은 다소 달랐지만 서로를 인정하면서 구국의 일념으로 일생을 살다 갔다.

전해오는 일화에 의하면 고광순 의병장이 춘강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표면상으로는 할 수 없다 답했지만 녹천이 밤에 곡간에서 군량미로 사용할 쌀을 퍼가는 것을 보고도 고정주 선생은 제지하지 않고 용인하였다 한다.

늦었지만 그 고귀한 뜻을 이어갈 수 있도록 춘강 고정주 고택이 지난 2008년 4월 11일 전남도민속자료 42호로 지정되었다. 1913년에 건립된 것으로 상량문에 기록된 이 고택은 우리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ㄷ자형 한옥이며 사랑채는 앞서 말한 육호당이고 사당과 잠실도 함께 있다.

어떻든 선생의 유지를 이어가고자 하는 노력들은 창평지역 내에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창흥의숙 창평초등학교내에 영학숙아카데미 설립추진으로 나타나고 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토인비가 말했듯 우리는 지난 역사를 보며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우리를 더욱 발전시켜 나가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