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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관광자원 궁중 떡갈비를 담양에 전하다! 노송당 송희경(2)

수병재 2011. 10. 13. 08:38

어버이 봉양위해 함양군수 자청…퇴임후 담양행
형제애 남다르고 봄 ·가을 논산 성묘 거르지않아
사회 종교 행정 제도 풍속 담은 일본행록 귀중한 자료
300편의 시 “아름답고 격앙하면서도 노기없다”극찬

 

노송당 송희경 선생이 일본기행을 마치고 천신만고 끝에 귀국하여 그해 10월 25일 임금께 보고하니 임금은 일본의 사정을 물어보고 오가며 고생한 것을 치하하였다. 아울러 세종은 공이 만리타국에서 돌아왔으니 시를 짓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며 공달에게 지시하여 이를 행하도록 하였다. 이에 성은의 망극함에 시를 읊으니 세종대왕은 그 높은 학식과 충정을 가상히 여겨 시가에 찬입하라고 명하여 공의 일본행록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태종이 승하하자 실록편수에 참여했다가 늙으신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해 수차례 청한 끝에 1424년에 함양군수로 발령받아 지성으로 효도하고 치적을 쌓았다. 군민들이 감화하여 칭송하였으며 1425년에 퇴임한 후 판사재를 최종직으로 만년에 담양으로 퇴거하였다.

공의 아우는 높은 벼슬을 거쳐 영광으로 이거하였다. 형제간의 우애가 출중하여 먼 거리이지만 왕래하면서 늙도록 우애를 두텁게 했으며 춘추로 선대가 모셔져 있는 논산까지 성묘길을 거른 적이 없었다 한다.

1446년 봉산면 기곡리 자택에서 세상을 뜨셨으니 향년 71세이셨다.

그러나 노송당이 남긴 일본행록은 도중에 두 번이나 유실되었지만 천우신조로 다시 찾게 되었다. 면앙정 송순 선생이 발문을 지은 글을 보면,

부군의 맑은 이름과 곧은 절개, 그리고 학업과 문장이 사람들의 이목에 빛난 바 많았으나 불행히도 가첩이 유실되어 항상 통탄함을 이기지 못했다. 병진(1566)년 여름에 내가 담양의 옛집에 있는데 외종재인 양산보가 책 한권을 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이 책은 우연히 늙은 선비 오상에게서 얻은 바라고 한다. 바삐 펼쳐보니 틀림없는 부군의 일본행록이다.

라고 기록되어 실전되었던 일본행록이 우연히 다시 찾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후 1597년에 일어난 정유재란 때 또 다시 유실되었는데 공의 현손인 송징이 이를 다시 구하게 되었다. 그 내력을 보면 기이하게도 난리 때 일군의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간 정경득이란 분이 그 기구한 운명 속에서 일본의 한 사찰에서 이 책을 보고 필사하여 송징에게 전하게 된 것이라 하니 노송당의 후손들이 한결같이 선조에 대한 사모의 정이 강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떻든 노송당의 일본행록은 당시 일본의 사회, 종교, 행정, 제도, 풍속 등 다양한 면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당시 일본의 성문화를 엿볼 수 있는 대목도 눈에 띈다. “실로 여색, 남색이 크게 행해져 위로는 왕으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분을 바른 소년을 사랑하고 또 여자가 남자보다 배가 많아 길을 막고 행인에게 숙박을 강요하며 여자가 자색이 출중함은 일본이 풍광에 명미하여 만들어낸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특히 여승들의 경우 “이 절의 중과 여승은 항상 불당에서 같이 자는데 서로 범하지 않느냐”고 묻자 삼보라가 웃으며 대답하기를 "여승이 잉태하면 부모의 집에 가서 출산하고 그 뒤로 불전에 와서 엎드리면 본연의 자세로 돌아간다 했다"는 기록도 있다.

노송당은 일본에 머물면서 보고 들은 여러 가지 것들을 상세히 행록에 기록하여 우리나라가 왜구의 침략에 대비하며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정보들을 집대성해 후일에 대책을 세우는 데 일조하였다.

더욱이 240여 수에 달하는 행록에 나오는 한시들을 보면 공의 고손자로 국문학사에 찬연히 빛나는 면앙정 송순 선생의 문학적 자질이 그저 탄생된 것이 아니라 대대로 내려져 오는 가풍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심지어 일본인들조차도 노송당의 시를 보고 “그분의 시에는 두려움도 분노의 마음도 나타내지 않았으며, 위급할 때에도 한가하고 태평한 기운이 중심으로부터 밖에 나타나 아름다우면서도 범연치 않고, 격앙하면서도 노기가 없다”며 300편의 시를 읊어 모든 물음에 응답했음을 높이 평가하였다 한다.

더욱이 노송당은 유불이 하나임을 시로 노래했는데 시모노세키에 도착하여 뱃멀미로 인해 누워있게 된 상황에서도 승려들과 시를 주고 받으며 이른 바 필담을 나눴다. 그 중에 유교와 불교가 추구하는 도는 결국 하나임을 설파했는데 그 시를 보면 다음과 같다.

유생은 실학을 전하고
석씨는 공문을 향하네(석가모니는 법문을 향하네)
참과 거짓이 하늘과 땅같이 현격하지만
마음이 서로 통하는 것이 기쁘네
유람하여 상역에 이르러
병으로 누워 용문을 대하였네
스님의 의범은 뵙지 못했으나
시를 보니 도를 이미 알겠네
* 용문 - 중국 황화 상류에 있는 여울목으로 잉어가 이곳을 거슬러 올라ㅡ면 용이 된다고 한다. 명망이 높은 사람을 비유해서 쓰는 말이다.

이처럼 그는 명문장가이면서 조선 초기 평화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특사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완성한 훌륭한 외교관이었다. 어떤 글에서는 공이 금산군사로 임명되었을 때 사냥을 담당하던 아전이 사냥한 노루와 사슴을 숨긴다 하여 죄를 물어 곤장을 때려 죽은 사실을 상소하는 내용도 나오지만 이는 공이 매사를 원칙적으로 처리하였음을 반증하는 것으로 일본에 가서도 굽히지 않는 지조와 절의의 정신이라 할 것이다.

공의 그러한 업적들을 숭상하여 후손들은 수북면 남산리의 구산사에 노송당 송희경 선생을 배향하여 흠모해왔다.

송희경이 마지막 살았던 봉산면 기곡리...담양에 자리를 잡은 송희경은 일본사회의 종교,행정,풍속등 다방면에 걸친 내용을 담은 일본행록을 집필했다. 이기록은 우리나라가 왜구의 침략에 대비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던 귀중한 자료다. 이책에 게재된 240수의 한시는 문장솜씨가 뛰어나 국문학사에 찬연한 빛을 발하고있다. 외교관역할까지했던 송희경은 무엇보다 담양 땅에 궁중 음식이었던 떡갈비를 전수시켜 담양인에게는 큰 재산을 안겨준셈이다. 송희경은 1446년 71세되던해에 봉산면 기곡리에서 생을 마감했다. /김승룡 기자


요즘들어 관광문화의 발달과 함께 담양은 물론 남도를 대표하는 음식으로 떡갈비를 거론하는데 이 떡갈비 또한 노송당 선생이 담양으로 이거해 와 살면서 궁중음식의 하나였던 떡갈비가 담양의 향토음식으로 자리잡게 되었다고 하니 노송당 송희경 선생의 업적은 비단 일본행록을 쓰신 것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관광소득의 한 몫을 담당하여 담양을 더 발전시키는 데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떡갈비를 먹을 때마다 맛깔스런 담양의 음식문화의 한 축을 일궈내신 노송당을 기리며 감사의 마음을 전하면서 면앙정만을 둘러볼 것이 아니라 그 옆에 있는 공의 묘소에 한번쯤 참배라도 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