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꽃세상
이젠 봄이 사라지나보다. 생명이 꿈틀거리며 약동하는 봄을 모두들 느끼고 싶어 하는데 봄은 소리없이 왔다가 소리없이 가버리는 듯하다. 한낮의 기온이 20도를 훌쩍 넘기니 초여름 날씨를 방불케 한다.
날씨가 이러다보니 이전엔 하나둘 순서대로 피던 꽃들이 한꺼번에 피어 봄꽃들을 완상할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는다. 모두들 아우성치듯 참아왔던 기운들을 토해내며 아름다운 자기 모습을 뽐내려고 난리다. 매화가 핀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벚꽃이 활짝 피더만 금새 지는 추새다. 복숭아꽃도 핑크빛 열정을 뽐내고 있는데 때마침 이제 갓 결성된 동네 산악회에서 영취산의 진달래를 보러 간단다. 사실 예전의 날씨로는 진작 만개했을 터인데 유달리 추웠던 금년의 기후탓인지 이제야 만개라 한다.
오래전부터 명성이 자자한 영취산 진달래를 친히 보고 싶었는데 드디어 그 소원을 이루게 되었으니 만사를 제끼고 참가신청을 하여 장도에 오른다.
우리가 가는 코스는 GS 칼텍스 정유공장 방면에서 정상까지 올라 도솔암을 지나 봉우재를 거쳐 흥국사로 내려가는 길이다. 영취산의 정상인 진례봉은 해발 510미터. 그다지 높지 않은 듯 하지만 바다를 옆에 끼고 있는 산이라 그런지 실제 오르는 길은 해발 700미터 이상의 산행을 하는 느낌이다.
게다가 엄청난 인파로 인해 등산로 자체는 정체와 서행을 거듭하니 허위허위 오르고만 싶은 욕망을 자제하기 힘들다. 하여 어쩔 수 없이 다른 분들에게 죄송하지만 추월을 하게 된다.
그렇게 땀 흘리며 30여분을 넘게 오르니 드디어 진달래 군락이 눈앞에 펼쳐진다. 우와! 산에 불이 활활 타는 듯 눈부신 장관! 벌린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다.
온 산을 가득 채운 진달래물결! 누가 저렇게 가꾼 것일까? 그러기에는 너무도 인위적인 냄새가 나지 않는데 위대한 자연의 신비에 그저 감탄만 할 뿐.
진달래 물결은 능선을 이으며 정상까지 계속된다. 수키로에 이르는 저 물결따라 걷는 길은 행복하기만 하다. 사람에 치이고 때론 정체되어 힘들기도 하지만 모든 이들의 얼굴엔 행복한 미소뿐이다.
나무는 죽어서도 이름값을 한다. 생거천년 사거천년 한다는 주목은 아닐지언정 함부로 쉽게 거꾸러지지 않고 거꾸러져서도 무의미하지 않게 주변 동식물들에게 먹을거리와 자양분을 제공해주니 나눔을 실천하는 자연의 모습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하나 둘이 아니다.
저 멀리 우리가 오르기 시작했던 지점이 보인다. 세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든다는 정유공장의 어지러운 배관시설들이 오늘만큼은 진달래 눈꽃에 가리어 눈에 들어오지 못한다. 온통 핏빛 울음 토해내며 구슬피 울어대는 두견의 원혼인양 영취산은 붉게 물든 가슴 내보이며 내 슬픔을 아느냐는 듯 담담히 서 있다.
이 잔인한 봄날, 4월은 진달래 선홍빛 물결로 너는 누구를 얼마나 사랑해보았느냐며 우리에게 되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