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둘레길 4구간 5구간 순례기
꼴방같은 곳에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새벽에 일어난다. 다른 민박집처럼 아침을 해주지도 않으니 우린 일찍 씻고 오늘의 일정을 소화하기로 하고 집을 나선다. 바가지를 쓴 듯한 기분으로 민박집을 나서니 폐교를 활용하여 여러 가지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는 곳을 비롯해 도처에 플랭카드가 걸려있다. No Dam! 이렇게 깊은 산중에 댐이 왠말이냐!
백무동과 칠선계곡에서 내려오는 물줄기가 만나는 지점인 금계 앞 의중마을을 가면서 보니 마을을 지켜 온 당산나무에도 플랭카드를 걸고 주민들의 강고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칠선계곡에서 내려오는 고운 물줄기는 인간의 오만으로 댐을 막더라도 우리의 강고한 물길은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의중마을은 수해피해를 많이 입었는지 복구에 한창이다. 이전 모습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우린 공사중인 관계로 우회하여 진행한다. 그런데 길을 걷는 도중에 승합차가 한 대 갑자기 우리 앞에 멈춘다. 차량에는 벽송사라는 글씨가 새겨 있다. 운전을 하는 처사께서 우리 일행에게 어딜 가느냐고 묻는다. 벽송사를 간다고 했더니 타라고 한다. 우와~ 이렇게 기분 좋을 수가...사실 벽송사까지 올라가려면 한참을 걸어야 한다. 어제 금계까지 달려오다시피 한 우리로서는 구세주나 다름없다.
벽송사에 도착하여 우린 곧장 미인송, 도인송으로 향한다.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삼층석탑과 함께 멋진 포즈를 취하고 있는 미인송과 도인송은 벽송사 문고리만 잡아도 도를 깨우친다는 전설을 만들어 낸 주인공이라 한다. 이곳은 벽송사를 창건한 벽송대사의 뒤를 이어 부용영관 선사가 청허휴정과 부휴선수를 배출해낸 의미있는 사찰이라고 한다.
또한 특이하게도 변강쇠와 옹녀의 전설이 서려 있어 사찰 입구에는 장승이 서 있다. 익살스런 표정으로 우리를 맞이하고 있는 장승은 조금은 훼손되었지만 그 모양새는 늠름하다.
벽송사를 내려 오니 서암정사다. 서암정사는 입구부터가 기막힌 석공의 솜씨로 장식되어 있다. 현대 석공의 작품이지만 통일신라 불교미술의 찬연한 시기 작품과 비교해도 결코 손색이 없을 정도다. 게다가 마천석 특유의 석질감을 맛볼 수 있어 이 또한 석공의 세밀한 손길을 거쳐 아름다움이 한껏 드러난다.
제2석굴암으로까지 불리운다는 이 곳은 이미 유명세를 탄 탓인지 대웅전의 중창불사가 한창이다. 단청을 곱게 칠하고 있는 예술인들의 손길에서 감탄을 느끼는 것보다 이전의 조촐했던 사찰모습이 더 아름답게 그려짐은 무슨 까닭일까? 인간들은 그저 조금만 여유로워지면 나름의 바벨탑을 쌓기 위해 저리도 열심일 뿐, 정작 오도재에서 도를 깨우쳤던 수많은 선사들의 가르침은 뒷전에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조차도 정작 나를 돌아보면 남을 탓할 일만은 아니다. 우리 또한 현실적인 갈등 속에서 헤매다 이렇게 순례를 하고 있지 않은가!
어떻든 제2석굴암 내부의 멋진 종교미술작품을 감상하고 우린 서암정사를 나선다. 내려오는 길은 아스팔트 길이 아니라 숲길이다. 올라가는 길이 아니라서 무척 다행임을 느끼며 내려오다 보니 의중마을이다. 마을에는 가로수처럼 옻나무들이 많고 옻칠을 얻기 위해 나무에 생채기를 내어 옻을 받은 흔적들이 널려 있다. 오늘이 복날이니 생각 같아선 옻닭이라도 한 마리 먹고 가고 싶지만 도대체 식당이 보이질 않는다. 어쩔 수 없이 걷는 길 외엔 다른 방법이 없다.
그러나 아침도 하지 않고 나섰던 길이라 시장기는 우릴 부여잡는다. 모정이라도 나오면 라면에 밥이라도 해먹고 갈텐데 모정은 보이질 않는다. 마음은 급하고 비는 내리는데 뒷재농원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무작정 들어 가 양해를 구하니 편히 쉬어 가라며 우릴 반긴다. 너무도 고마운 시골인심이다. 다음 기회에 옻이라도 택배로 시켜 고마움에 답례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주인도 나가고 없는 집에서 명함을 빼온다.
이젠 산속을 헤매고 다니는 숲길이다. 상당히 걷는데도 용유담은 나오질 않는다. 가는 길목에 계곡물이 조금 흐르는 곳이 있어 땀을 씻고 잠시 휴식을 취하는데 첫날 만났던 젊은 친구들이 걸어온다. 너무도 반갑다. 서로 반가운 인사를 하며 더위를 식혀 줄 주막이 나오면 무조건 먼저 도착한 사람들이 기다리기로 약속하고 우린 발걸음을 재촉한다.
드디어 용유담이다. 정말 아름다운 계곡이다. 얼마나 많은 용들이 이곳에서 노닐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을까! 이토록 아름다운 곳이 댐으로 수몰된다면 우린 얼마나 많은 아쉬움 속에서 살아가야 할까! 인간의 작은 욕망을 위해 아름다운 자연을 파괴하는 행위는 더 이상 있어서는 안될 터인데.....
다시 돌아봐도 아름다운 용유담을 뒤로 하고 우린 엄천강을 바라보며 계속 걷는다. 가는 도중 드디어 주막이 하나 보인다. 너무도 반갑다. 소위 “밥아, 너 본지 오래다”처럼 성급히 막걸리를 꺼내어 먼저 들이킨다. 여기 막걸리는 특이하게 이순신막걸리다.
한잔 들이키고 있으니 젊은 친구들이 곧장 들어 온다. 서로 부어라 마셔라 하며 즐겁게 정담을 나누는데 이 친구들이 점심은 자기들이 사겠다고 한다. 이젠 다섯이 한 팀이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동강까지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