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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은 정자가 많은 고장이다. 하여 예로부터 과거에 급제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정자를 하나 남기는 것이야말로 대대로 이름을 남기게 되는 것이니 이를 더 소중히 여겼다고 한다. 요즘엔 돌에 이름 새기며 공치사를 하는게 유행처럼 되고 있지만 우리 선조들은 이름을 날려도 많은 사람들이 편히 쉬고 즐기며 함께 하는 공간으로 정자를 남기었으니 요즘의 우리 세태와는 차원이 다른것 같다.
관수재 원운(元韻)
(草屋臨溪掩竹門) 시냇가 초가 짓고 대사립 닫았으니
(安貧至樂此中存) 안빈낙도(安貧樂道) 편안함이 이 가운데 있는 것을
(雲山合沓圍平野) 운산(雲山)이 하나 되어 평야(平野)를 에워싸고
(烟樹迷茫接遠村) 연기 속에 가물가물 먼 마을까지 닿았네.
(視古猶今書滿架) 옛날을 이제 보랴. 책 시렁에 가득하고
(通神去穢藥攔園) 맑아지는 약포(藥圃)가 정원을 가로막았어,
(分流一帶來軒下) 갈라진 시내 줄기 처마 밑으로 흘러가니
(乘醉投竿錦浪源) 취한 김에 낚시대 고운 물에 던지노라.
관수정에서 바라본 삼인산(2003 이규현)
대전면 대치리 동산 위에 있는 관수정의 원운이다. 관수정의 주인은 묵은 이정신으로 선조때인 1593년에 태어나서 진사에 합격하였으나 인목대비 유폐사건 등으로 인해 혼탁한 조정상을 보고 그대로 귀가하여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에서 관수재를 짓고 수기치인하며 여느 사림과 마찬가지의 삶을 보낸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격문을 발송하여 의병을 모아 여산까지 진격했으나 인조가 삼전도에서 무릎을 꿇자 통곡하며 돌아 왔다.
예로부터 물이란 만물의 근원으로 학문을 연마하는 선비들에게 뿐만아니라 수행을 하는 수도자들에게도 언제나 자기를 바라보는 대상이었다. 물이란 그 자체가 법이고 순리이고 또한 명경지수처럼 자신을 돌아보는 거울이었기 때문이다.
하여 관수정이란 이름을 가진 정자는 여러 곳에 있다. 고서면 분향리에도 있고 장성군 삼계면에도 지지당 송흠 선생이 지으셨던 관수정이 있다.
대전면의 관수정은 담양이 정자의 고장이라지만 대전면에서만은 유구한 역사를 가진 유일한 정자이다. 1634년에 지어진 이 정자의 원래의 위치는 지금의 전차포 사격장인 신촌마을이었다고 한다. 금남 정충신이 지은 관수재기에는 "그가 사는 집 서쪽에 조그마한 공간 두어평 되는 땅이 있는데 두어 이랑을 파서 샘물을 끌어 시내를 만들고 시냇물 의지하여 정자를 지으면서 .....오직 두어그루의 매화와 대숲만 있을뿐이니...사람들이 그 즐거움을 물어보면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으니 이는 그가 물을 즐거워할뿐이었다"고 쓰고 있다.
그러다가 1918년에 현 위치로 이거하게 되었고 다시 2000년에 후손들에 의해 중수되었다고 한다.
대전면 소재지인 대치리와 평장리를 가르는 접경에 위치한 관수정은 절벽아래의 바위에 봄이면 진달래를 비롯한 꽃들이 만발하여 이 절벽을 꽃바우(화암)이라 부른다. 절벽아래로는 대치천이 흘러내려가고 대치천을 따라 북서쪽을 바라보면 화암마을이다. 밀양박씨들이 자자일촌을 이루고 있는 이 마을은 임진왜란때 오부자가 왜군과 싸우다 순절한 충정을 기리기 위한 오충정려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시대는 다르지만 이렇게 결국은 뜻이 함께 하는 사람들은 저절로 모이게 되나 보다. 예로부터 초야에 묻혀 열심히 자신을 수양하며 학문을 연마하다가 나라가 위태로우면 과감히 떨쳐 일어나 분연히 한몸 바쳐 구국충정을 불태우는 선비들의 의연한 모습이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 등을 넘어 5.18 광주민중항쟁으로 찬연히 이어지는 것이리라.
그러기에 정자에 올라서면 더욱 숙연한 마음들이 앞서게 된다.
관수정에서 단지 흐르는 물만을 보는게 아니라 우리는 우리 자신까지 볼 수 있도록 노력할 일다. 진정 우리가 봐야 할것은 과연 무엇인가...
액차처럼 펼쳐진 삼인산의 정경앞에 오랜 인고의 세월을 딛고 당당히 서 있는 저 소나무처럼 말없이 우뚝하게 자신만의 경지를 만들어 나가는 자연의 위대한 모습들을 다시금 보고 배울일이다.
관수재 원운(元韻)
(草屋臨溪掩竹門) 시냇가 초가 짓고 대사립 닫았으니
(安貧至樂此中存) 안빈낙도(安貧樂道) 편안함이 이 가운데 있는 것을
(雲山合沓圍平野) 운산(雲山)이 하나 되어 평야(平野)를 에워싸고
(烟樹迷茫接遠村) 연기 속에 가물가물 먼 마을까지 닿았네.
(視古猶今書滿架) 옛날을 이제 보랴. 책 시렁에 가득하고
(通神去穢藥攔園) 맑아지는 약포(藥圃)가 정원을 가로막았어,
(分流一帶來軒下) 갈라진 시내 줄기 처마 밑으로 흘러가니
(乘醉投竿錦浪源) 취한 김에 낚시대 고운 물에 던지노라.
관수정에서 바라본 삼인산(2003 이규현)
대전면 대치리 동산 위에 있는 관수정의 원운이다. 관수정의 주인은 묵은 이정신으로 선조때인 1593년에 태어나서 진사에 합격하였으나 인목대비 유폐사건 등으로 인해 혼탁한 조정상을 보고 그대로 귀가하여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에서 관수재를 짓고 수기치인하며 여느 사림과 마찬가지의 삶을 보낸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격문을 발송하여 의병을 모아 여산까지 진격했으나 인조가 삼전도에서 무릎을 꿇자 통곡하며 돌아 왔다.
예로부터 물이란 만물의 근원으로 학문을 연마하는 선비들에게 뿐만아니라 수행을 하는 수도자들에게도 언제나 자기를 바라보는 대상이었다. 물이란 그 자체가 법이고 순리이고 또한 명경지수처럼 자신을 돌아보는 거울이었기 때문이다.
하여 관수정이란 이름을 가진 정자는 여러 곳에 있다. 고서면 분향리에도 있고 장성군 삼계면에도 지지당 송흠 선생이 지으셨던 관수정이 있다.
대전면의 관수정은 담양이 정자의 고장이라지만 대전면에서만은 유구한 역사를 가진 유일한 정자이다. 1634년에 지어진 이 정자의 원래의 위치는 지금의 전차포 사격장인 신촌마을이었다고 한다. 금남 정충신이 지은 관수재기에는 "그가 사는 집 서쪽에 조그마한 공간 두어평 되는 땅이 있는데 두어 이랑을 파서 샘물을 끌어 시내를 만들고 시냇물 의지하여 정자를 지으면서 .....오직 두어그루의 매화와 대숲만 있을뿐이니...사람들이 그 즐거움을 물어보면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으니 이는 그가 물을 즐거워할뿐이었다"고 쓰고 있다.
그러다가 1918년에 현 위치로 이거하게 되었고 다시 2000년에 후손들에 의해 중수되었다고 한다.
대전면 소재지인 대치리와 평장리를 가르는 접경에 위치한 관수정은 절벽아래의 바위에 봄이면 진달래를 비롯한 꽃들이 만발하여 이 절벽을 꽃바우(화암)이라 부른다. 절벽아래로는 대치천이 흘러내려가고 대치천을 따라 북서쪽을 바라보면 화암마을이다. 밀양박씨들이 자자일촌을 이루고 있는 이 마을은 임진왜란때 오부자가 왜군과 싸우다 순절한 충정을 기리기 위한 오충정려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시대는 다르지만 이렇게 결국은 뜻이 함께 하는 사람들은 저절로 모이게 되나 보다. 예로부터 초야에 묻혀 열심히 자신을 수양하며 학문을 연마하다가 나라가 위태로우면 과감히 떨쳐 일어나 분연히 한몸 바쳐 구국충정을 불태우는 선비들의 의연한 모습이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 등을 넘어 5.18 광주민중항쟁으로 찬연히 이어지는 것이리라.
그러기에 정자에 올라서면 더욱 숙연한 마음들이 앞서게 된다.
관수정에서 단지 흐르는 물만을 보는게 아니라 우리는 우리 자신까지 볼 수 있도록 노력할 일다. 진정 우리가 봐야 할것은 과연 무엇인가...
액차처럼 펼쳐진 삼인산의 정경앞에 오랜 인고의 세월을 딛고 당당히 서 있는 저 소나무처럼 말없이 우뚝하게 자신만의 경지를 만들어 나가는 자연의 위대한 모습들을 다시금 보고 배울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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