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다시 보는 만주벌판은 이제 지난 날의 우리 역사에 대한 회상만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경지정리가 되지는 않았지만 끝없이 펼쳐진 구릉과 평원속에 심어진 옥수수와 벼들이 우리 농민들의 미래를 암담하게 하는 모습들이기에 이를 쳐다보는 마음은 결코 풍요롭지 못합니다. 다른 나라에 가서 느끼기 힘든 심적인 부담들이 여기에선 진하게 다가옵니다.
그런 아픔들을 삼키며 기차는 어느 덧 심양에서 통화를 향하여 달립니다.
밤 10시 침대칸에 몸을 실어 이역만리 피로에 지친 역정은 곧 바로 코골이와 숙면으로 빠져들게 합니다. 하지만 만주의 밤은 우리네 밤보다 더 짧은 거 같습니다. 새벽 4시 경에 눈을 뜨니 밖이 환합니다. 이미 나와서 운동을 하는 만주사람들의 모습도 간간히 눈에 띕니다.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니 중국인들 중 남방쪽 사람들의 경우엔 좀 게으르지만 이쪽 사람들의 경우 대단히 부지런한 거 같습니다. 들에 소를 몰고 나와서 꼴을 뜯기는 사람. 운동을 하는 사람, 옥수수 밭에서 밭을 매는 사람 등등 다양한 모습들의 삶의 단면이 보입니다.
여기는 간도! 우리 선조들이 피땀흘려 일궜던 우리의 땅인데 국력의 약화와 열강들의 등살에 휘말려 잘못된 국제협약으로 이젠 남의 땅이 되어 버렸습니다. 멀리 고조선의 단군왕검에서부터 고구려의 웅혼한 기상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 바로 거기에 대한민국은 없고 조선은 없고 오로지 상혼만이 판치는 중국인들의 장사술만이 남아 있습니다.
통화역에 내리자마자 조그마한 팻말을 가지고 달라드는 택시기사들의 소리는 시끄럽기만 지만 거기에 쓰여 있는 글씨들은 눈시울을 적시게 합니다. 광개토대왕비가 있는 “집안”, 민족의 영산 “백두산”-이쪽에선 장백산이라고 이야기 하더군요- 낯익은 지명이 우릴 사로 잡네요. 하지만 잘 통하지 못하는 언어의 장벽으로 혹여 바가지씌움을 당할가봐 버스와 기차 등을 다시 알아봅니다. 하지만 대중교통이 우리처럼 발달되어 있지 않아서 기차의 경우 밤에나 도착하고 버스도 몇시간이 걸린다고 합니다. 물론 버스나 기차나 모두 내려서 다시 백두산까지 가야하는 번거로움도 있구요. 하여 일단은 집안으로 가는 택시를 흥정하여 차에 올랐습니다.
통화시는 꽤 큰 도시인 듯 합니다. 인구가 150만이 넘은다고 하니 광주보다도 더 큰 도시입니다. 그럼에도 도시의 외관은 우리의 60~70년대를 보는 듯 합니다. 수많은 자전거 인파, 심지어는 말구르마 등도 많이 보입니다. 오토바이를 개조한 삼륜차도 보이고 한때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이용했던 삼륜차가 여기엔 아주 많습니다. 지극히 위태롭고 불안해 보이는 삼륜차는 소형승용차용에서부터 화물용까지 개발이 되어 있습니다.
택시는 곡예운전입니다. 중앙선은 도대체 왜 있는 것인지? 지나가는 자전거 탄 행인들과 부딪힐듯한 운전에 그저 탄복을 해야 할지? 제 오른발은 스스로가 절로 브레이크를 밟듯 안타깝기만 한 가운데 시내를 지나니 그래도 운전이 조금은 부드러워집니다. 정말 조마조마한 마음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지만 그것도 잠간입니다. 2차선 도로인데 기본속도를 보니 거의 100키로가 넘습니다. 그러다 앞에서 오는 차량과 서로 부딪힐뻔한 교유가 몇 번이나 됩니다. 조금 천천히 갈 수 없냐고 해도 그네들의 습관인지 우리 말은 전혀 듣지 않고 달리기만 합니다. 마치 우리네 총알택시를 탄 것과 같은거죠.
어떻든 그리하여 우리는 집안현에 당도했습니다.
아! 고구려......웅혼한 우리네 기상이 서려 있는 곳! 대륙을 호령하던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말밥굽소리가 아직도 들리는 듯.........압록강가의 집안현은 분지형의 조그마한 도시였습니다. 우리네 말로 밥집이라 쓰여 있는 간판이 무지 정겹기만 합니다. 밤새 열차를 타고 아침에 도착한게 7시. 곧장 택시로 두시간여를 달려왔습니다. 굶주린 배속이지만 그래도 수십년만의 귀향길처럼 마음은 풍요롭기만 합니다.

집안현 역앞의 마차들(2005 이규현)
이리저리 식당을 찾아 헤매다 시장 옆의 중국음식집으로 들어가서 죽과 만두, 빵으로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합니다. 김치며 콩나물 등이 있는데 우리 입맛하고는 완전 딴판입니다. 그래도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음식이 입에 맞던 안맞던 주린 배를 달래놓아야 할 형편이고 또한 외국에 나왔으면 그 나라의 전통음식을 맛보는 것도 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라 억지로라도 먹어봅니다.

광개토대왕비(2005 이규현) 장군총 측면의 석축(2005 이규현)
세워 놓은 거대한 바위들. 저 바위들이 있는 곳은 석축이 무너지지 않고 있다.
이윽고 찾아간 광개토대왕비는 저리도 엄청난 유리집 속에 숨조차 제대로 못쉬고 갇혀 있습니다. 중국인들의 과거사 말살정책의 일환인 동북공정의 결과물을 보는 듯 합니다. 아픈 마음 달랠길 없습니다.
여기가 바로 우리 땅이고 우리의 역사이고 우리의 주무대이었던 곳인데 이젠 엄청난 입장료를 주고 들어와야 하는 현장이 되었습니다.
빼앗긴 간도의 현장에서 우리가 받는 대접은 바로 이런것이었습니다. 광개토대왕비와 릉을 나와 다시 가보는 장군총도 또한 엄청난 입장료를 요구합니다. 우리 돈으로 한사람당 12,000원이 넘은 돈입니다. 주차료는 주차료대로 별도로 받고 입장료 또한 이렇게 비쌉니다. 한국인들을 겨냥한 중국인들의 상술이 여실히 엿보이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또 한켠에선 이렇게 자랑스런 우리의 문화가 있었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 뿌뜻해집니다. 오죽하면 왜곡해서라도 자기네의 역사로 만들어 합리화 시키려했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나옴은 괜한 피해자의 억지망상은 아닐테지요.
광개토대왕릉과 장군총은 엇비슷하면서도 장군총이 훨씬 더 발달된 능임을 느끼게 만듭니다. 장군총은 마치 피라미드처럼 맨 아랫단부터 차곡차곡 커다란 돌들을 다듬어 석축을 쌓아올려 갔고 정상부에 석실무덤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하지만 광개토대왕릉은 아래부분은 돌무더기 등으로 쌓아 올렸다가 어느 정도 윗 부분에서부터 석축을 쌓아올리고 상부에 석실을 만들었습니다. 장수왕의 무덤으로 알려진 장군총은 광개토대왕의 아들 무덤답게 더 발달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특이한게 무덤 주위에 배장묘라고 하는 부속 묘가 보이는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석축을 쌓아 올리면서 토압 등에 의한 붕괴를 막기 위하여 중간중간에 엄청난 바위돌을 비켜 세워서 압력에 견디도록 하였다는 것입니다.
1,000년이 훌쩍 넘은 세월 속에서도 저렇게 힘의 원리와 균형을 맞추는 선인들의 지혜가 대단합니다.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하는 장군총의 위용 속에서 고구려의 기상을 느끼며 발걸음은 고분벽화가 가득한 고분군으로 향합니다. 하지만 거기에서도 또 다시 당한 기분! 실제의 벽화를 볼수 있다는 매표원의 말을 믿고 거금을 주고 입장했더니 고분군의 외관만 돌아보고 오고 말았습니다. 전시실에는 고분을 복제한 사진들을 걸어놓고 영상으로 열심히 설명해주는 가이드의 소리가 복잡한 우리네 심금을 울릴뿐입니다.

압록강과 북한의 헐벗은 산야
안타까운 마음 속에 압록강이 바로 지척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우리는 꿈에 그리던 압록의 물결을 보러 방향을 돌립니다. 바라보이는 산 정상에 거대한 굴뚝이 있고 연기가 심하게 나옵니다. 어찌 이런 일들이 이 심심산천에서 벌어질수 있을까 저윽이 의심이 가는데 그 쪽은 북녘땅이랍니다. 어쩐지 예감이 이상하다 했더니 북한쪽 산자락은 벌거숭이들입니다. 중국쪽의 산과 뚜렷이 대별되는 모습에 목이 매입니다. 농경지의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저 높다랗고 비탈진 산에까지 나무를 다 베어내고 밭을 일구었습니다. 하지만 도리어 그것이 재앙이 되어 돌아옵니다. 우선 땔감이 없어져버려 매년 확보가 힘들게 되고 집중호우시에는 산사태가 일어나 엄청난 피해를 당하게 됩니다. 한치 앞을 못 내다보고 그저 닥친 어려움만을 해소하고자 하는 북녘땅 동포들의 안타까운 삶의 현장을 목도한 우리들은 흐르는 압록강의 물만큼이나 많은 눈물을 가슴 속에 흘립니다.
압록강은 우리의 슬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처없이 묵묵히 흐르기만 하는데 우린 행여 누군가 우리네 마음속이라도 들여다 볼까 두려워 얼른 뒷걸음쳐 돌아 나옵니다. 철길 따라 뛰어오는 마음 속에는 통일이 얼른 되어 인간다운 삶을 영유하지 못하고 있는 북녘의 동포들에게 희망의 빛이 내리쬐길 간절히 고대하는 마음으로 가득합니다.
그런 아픔들을 삼키며 기차는 어느 덧 심양에서 통화를 향하여 달립니다.
밤 10시 침대칸에 몸을 실어 이역만리 피로에 지친 역정은 곧 바로 코골이와 숙면으로 빠져들게 합니다. 하지만 만주의 밤은 우리네 밤보다 더 짧은 거 같습니다. 새벽 4시 경에 눈을 뜨니 밖이 환합니다. 이미 나와서 운동을 하는 만주사람들의 모습도 간간히 눈에 띕니다.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니 중국인들 중 남방쪽 사람들의 경우엔 좀 게으르지만 이쪽 사람들의 경우 대단히 부지런한 거 같습니다. 들에 소를 몰고 나와서 꼴을 뜯기는 사람. 운동을 하는 사람, 옥수수 밭에서 밭을 매는 사람 등등 다양한 모습들의 삶의 단면이 보입니다.
여기는 간도! 우리 선조들이 피땀흘려 일궜던 우리의 땅인데 국력의 약화와 열강들의 등살에 휘말려 잘못된 국제협약으로 이젠 남의 땅이 되어 버렸습니다. 멀리 고조선의 단군왕검에서부터 고구려의 웅혼한 기상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 바로 거기에 대한민국은 없고 조선은 없고 오로지 상혼만이 판치는 중국인들의 장사술만이 남아 있습니다.
통화역에 내리자마자 조그마한 팻말을 가지고 달라드는 택시기사들의 소리는 시끄럽기만 지만 거기에 쓰여 있는 글씨들은 눈시울을 적시게 합니다. 광개토대왕비가 있는 “집안”, 민족의 영산 “백두산”-이쪽에선 장백산이라고 이야기 하더군요- 낯익은 지명이 우릴 사로 잡네요. 하지만 잘 통하지 못하는 언어의 장벽으로 혹여 바가지씌움을 당할가봐 버스와 기차 등을 다시 알아봅니다. 하지만 대중교통이 우리처럼 발달되어 있지 않아서 기차의 경우 밤에나 도착하고 버스도 몇시간이 걸린다고 합니다. 물론 버스나 기차나 모두 내려서 다시 백두산까지 가야하는 번거로움도 있구요. 하여 일단은 집안으로 가는 택시를 흥정하여 차에 올랐습니다.
통화시는 꽤 큰 도시인 듯 합니다. 인구가 150만이 넘은다고 하니 광주보다도 더 큰 도시입니다. 그럼에도 도시의 외관은 우리의 60~70년대를 보는 듯 합니다. 수많은 자전거 인파, 심지어는 말구르마 등도 많이 보입니다. 오토바이를 개조한 삼륜차도 보이고 한때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이용했던 삼륜차가 여기엔 아주 많습니다. 지극히 위태롭고 불안해 보이는 삼륜차는 소형승용차용에서부터 화물용까지 개발이 되어 있습니다.
택시는 곡예운전입니다. 중앙선은 도대체 왜 있는 것인지? 지나가는 자전거 탄 행인들과 부딪힐듯한 운전에 그저 탄복을 해야 할지? 제 오른발은 스스로가 절로 브레이크를 밟듯 안타깝기만 한 가운데 시내를 지나니 그래도 운전이 조금은 부드러워집니다. 정말 조마조마한 마음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지만 그것도 잠간입니다. 2차선 도로인데 기본속도를 보니 거의 100키로가 넘습니다. 그러다 앞에서 오는 차량과 서로 부딪힐뻔한 교유가 몇 번이나 됩니다. 조금 천천히 갈 수 없냐고 해도 그네들의 습관인지 우리 말은 전혀 듣지 않고 달리기만 합니다. 마치 우리네 총알택시를 탄 것과 같은거죠.
어떻든 그리하여 우리는 집안현에 당도했습니다.
아! 고구려......웅혼한 우리네 기상이 서려 있는 곳! 대륙을 호령하던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말밥굽소리가 아직도 들리는 듯.........압록강가의 집안현은 분지형의 조그마한 도시였습니다. 우리네 말로 밥집이라 쓰여 있는 간판이 무지 정겹기만 합니다. 밤새 열차를 타고 아침에 도착한게 7시. 곧장 택시로 두시간여를 달려왔습니다. 굶주린 배속이지만 그래도 수십년만의 귀향길처럼 마음은 풍요롭기만 합니다.

집안현 역앞의 마차들(2005 이규현)
이리저리 식당을 찾아 헤매다 시장 옆의 중국음식집으로 들어가서 죽과 만두, 빵으로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합니다. 김치며 콩나물 등이 있는데 우리 입맛하고는 완전 딴판입니다. 그래도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음식이 입에 맞던 안맞던 주린 배를 달래놓아야 할 형편이고 또한 외국에 나왔으면 그 나라의 전통음식을 맛보는 것도 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라 억지로라도 먹어봅니다.


광개토대왕비(2005 이규현) 장군총 측면의 석축(2005 이규현)
세워 놓은 거대한 바위들. 저 바위들이 있는 곳은 석축이 무너지지 않고 있다.
이윽고 찾아간 광개토대왕비는 저리도 엄청난 유리집 속에 숨조차 제대로 못쉬고 갇혀 있습니다. 중국인들의 과거사 말살정책의 일환인 동북공정의 결과물을 보는 듯 합니다. 아픈 마음 달랠길 없습니다.
여기가 바로 우리 땅이고 우리의 역사이고 우리의 주무대이었던 곳인데 이젠 엄청난 입장료를 주고 들어와야 하는 현장이 되었습니다.
빼앗긴 간도의 현장에서 우리가 받는 대접은 바로 이런것이었습니다. 광개토대왕비와 릉을 나와 다시 가보는 장군총도 또한 엄청난 입장료를 요구합니다. 우리 돈으로 한사람당 12,000원이 넘은 돈입니다. 주차료는 주차료대로 별도로 받고 입장료 또한 이렇게 비쌉니다. 한국인들을 겨냥한 중국인들의 상술이 여실히 엿보이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또 한켠에선 이렇게 자랑스런 우리의 문화가 있었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 뿌뜻해집니다. 오죽하면 왜곡해서라도 자기네의 역사로 만들어 합리화 시키려했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나옴은 괜한 피해자의 억지망상은 아닐테지요.
광개토대왕릉과 장군총은 엇비슷하면서도 장군총이 훨씬 더 발달된 능임을 느끼게 만듭니다. 장군총은 마치 피라미드처럼 맨 아랫단부터 차곡차곡 커다란 돌들을 다듬어 석축을 쌓아올려 갔고 정상부에 석실무덤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하지만 광개토대왕릉은 아래부분은 돌무더기 등으로 쌓아 올렸다가 어느 정도 윗 부분에서부터 석축을 쌓아올리고 상부에 석실을 만들었습니다. 장수왕의 무덤으로 알려진 장군총은 광개토대왕의 아들 무덤답게 더 발달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특이한게 무덤 주위에 배장묘라고 하는 부속 묘가 보이는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석축을 쌓아 올리면서 토압 등에 의한 붕괴를 막기 위하여 중간중간에 엄청난 바위돌을 비켜 세워서 압력에 견디도록 하였다는 것입니다.
1,000년이 훌쩍 넘은 세월 속에서도 저렇게 힘의 원리와 균형을 맞추는 선인들의 지혜가 대단합니다.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하는 장군총의 위용 속에서 고구려의 기상을 느끼며 발걸음은 고분벽화가 가득한 고분군으로 향합니다. 하지만 거기에서도 또 다시 당한 기분! 실제의 벽화를 볼수 있다는 매표원의 말을 믿고 거금을 주고 입장했더니 고분군의 외관만 돌아보고 오고 말았습니다. 전시실에는 고분을 복제한 사진들을 걸어놓고 영상으로 열심히 설명해주는 가이드의 소리가 복잡한 우리네 심금을 울릴뿐입니다.

압록강과 북한의 헐벗은 산야
안타까운 마음 속에 압록강이 바로 지척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우리는 꿈에 그리던 압록의 물결을 보러 방향을 돌립니다. 바라보이는 산 정상에 거대한 굴뚝이 있고 연기가 심하게 나옵니다. 어찌 이런 일들이 이 심심산천에서 벌어질수 있을까 저윽이 의심이 가는데 그 쪽은 북녘땅이랍니다. 어쩐지 예감이 이상하다 했더니 북한쪽 산자락은 벌거숭이들입니다. 중국쪽의 산과 뚜렷이 대별되는 모습에 목이 매입니다. 농경지의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저 높다랗고 비탈진 산에까지 나무를 다 베어내고 밭을 일구었습니다. 하지만 도리어 그것이 재앙이 되어 돌아옵니다. 우선 땔감이 없어져버려 매년 확보가 힘들게 되고 집중호우시에는 산사태가 일어나 엄청난 피해를 당하게 됩니다. 한치 앞을 못 내다보고 그저 닥친 어려움만을 해소하고자 하는 북녘땅 동포들의 안타까운 삶의 현장을 목도한 우리들은 흐르는 압록강의 물만큼이나 많은 눈물을 가슴 속에 흘립니다.
압록강은 우리의 슬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처없이 묵묵히 흐르기만 하는데 우린 행여 누군가 우리네 마음속이라도 들여다 볼까 두려워 얼른 뒷걸음쳐 돌아 나옵니다. 철길 따라 뛰어오는 마음 속에는 통일이 얼른 되어 인간다운 삶을 영유하지 못하고 있는 북녘의 동포들에게 희망의 빛이 내리쬐길 간절히 고대하는 마음으로 가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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