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진숙(시인, 담양문화예술발전소 총무)
제1부 전우치, 실존과 가공 사이
전우치 설화는 담양에서 전해지는 구비전승 가운데서도 가장 흥미진진하고, 문화콘텐츠로 개발될 수 있는 요소들을 가장 많이 지니고 있는 이야기이다. 전우치는 『추성지』 고지산면(古之山面) 인물조에 원율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다.
전우치는 원율 사람이다. 기이한 도술을 부리므로 사람들이 이름하여 우객이라 하였으나 자세한 사실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에 대한 기록이 불명확하기 때문에 그를 실존했던 인물로 보는 데에는 많은 이견이 있다. 전우치를 가공의 인물로 보는 사람들은 이영간 설화와 사리역 용마설화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원율이 도교사상과 깊은 관련이 있는 고장이기 때문에 설화상의 인물인 전우치의 출신지가 원율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얘기한다. 이영간은 고려 문종대(1046~1083)에 활약하였던 역사적 인물로 『고려사』에 여러 차례 기이한 행적을 보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전우치가 도술을 익히는 과정이 이영간의 설화와 유사하다. 용마 설화에 대해서는 『추성지』 고지산면 고적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원율 사리역에 용마가 있었는데 늘 고갯마루에 숨었기 때문에 은봉이라고 불렀으며, 지금도 말이 숨은 형상이 있다. 우인과 술사가 많이 태어나니 이로 인해서 폐현을 시켰으며 옛터만 남았다.
원율현은 역사적으로 고려시대인 1391년(공양왕 3년) 담양 감무(고려시대 중앙정부가 속군현에 파견한 지방관)가 원율현까지 다스리게 되면서 폐현이 된 것인데, 설화는 술사가 많이 출현하여 폐현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설화에는 뛰어난 술사들이 출현하여 자신들을 구제해주기를 바라는 민중들의 염원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전우치가 바로 그러한 술사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전우치전』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개성에 사는 전우치는 신기한 도술을 얻고 숨어 살았는데, 해적의 약탈과 흉년으로 백성들이 비참한 지경에 이르자 천상선관(天上仙官)으로 변신하여 왕에게 나타난다. 옥황상제의 명령이라면서 황금들보를 만들게 하고, 그 들보를 외국에 팔아 산 쌀 수만 섬으로 백성들을 구휼한다. 사실을 알게 된 임금이 크게 노하여 전우치를 잡아다가 국문(鞠問)한다. 이에 전우치는 도술로 맞서다가 왕에게 “나의 죄를 다스릴 정신으로 백성을 다스리라”고 충고하여 풀려난다. 그 뒤 도술로써 선행을 베풀며 전국을 돌아다니고 도적의 무리를 다스리는 등 공을 세운다. 이를 시기한 간신이 역적의 누명을 씌워 처형당하게 되자 전우치는 마지막 소원이라며 그림 1장을 그리게 해달라고 한다. 왕이 이를 허락하자 산수화 속에 나귀 1마리를 그리더니 나귀를 타고 그림 속으로 사라진다. 그 뒤 전우치는 자신을 모해한 자를 도술로 골려주고 장난을 치며 돌아다닌다. 과부를 짝사랑해 상사병이 든 친구를 위해 그 과부를 구름에 태워오다가 강림도령에게 질책을 당한다. 그 뒤 화담 서경덕의 도학이 높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가 화담의 도술에 굴복하고 제자가 되어 태백산에 들어가 도를 닦았다고 한다.
전우치에 대해서는 실존여부가 쟁점이 되어 오고 있으마 그의 고향이나 본관, 그리고 동시대의 구체적 인물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는 여러 문헌자료가 전해지고 있어 실존인물이었을 가능성 또한 매우 높다.
박제가. 유득공. 이서구 등과 함께 <건연집>이라는 시집을 낸 영.정조 시대의 유명한 실학자인 이덕무(1739-1793)는 그의 저서 <청장관전서> 중 <한죽당필기>에서 전우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전우치는 담양사람이다. 어릴 때 암자에 들어가 공부를 하였는데, 하루는 절의 스님이 술을 빚어 놓고 우치에게 잘 보아달라고 부탁하고 산을 내려갔다. 그런데 스님이 돌아와 보니 술은 간데없고 찌꺼기만 남아 있어 스님이 책망하니 우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있다가 술을 다시 빚어 주면 진짜 도둑을 잡아내겠다고 하였다. 스님은 반신반의하면서 그의 말대로 다시 술을 빚어 주었다.
전우치가 술을 지키고 있노라니 갑자기 흰 기운이 무지개같이 창문으로 들어와 술 항아리에 잠시 머물더니 술 냄새가 진동하는 것이 아닌가? 흰 기운이 시작되는 곳을 찾으니 앞산 바위굴 속이었다. 그런데 그 굴속에 흰 여우 한 마리가 술에 잔뜩 취하여 자고 있었다.
우치는 밧줄로 여우의 다리를 묶어 등에 메고 와 암자의 들보에 메달아 놓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글을 읽고 있었다.
한참 있으니 여우가 술에서 깨어나 사람의 말로 “나를 놓아주면 그 은혜를 꼭 후히 갚겠습니다.” 라고 애원하는 것이었다. 우치가 “도망가려는 수작마라. 네가 무엇으로 은혜를 갚겠느냐? 차라리 죽여 버리는 것이 속 시원하겠다.” 하니, 여우가 “저에게 환술을 부릴 수 있는 비결책이 있는데 굴속에 감추었으니 그것을 드리겠습니다. 나를 묶어 둔 채 줄의 끝을 잡고 굴속으로 들여보내면 그 책을 찾아오겠습니다. 만약 굴속에서 나오지 않으면 줄을 잡아당겨 그 때 죽여도 늦지 않겠습니까”'라고 더욱 애원하였다.
우치가 그것도 괜찮겠다고 여기고 여우의 말대로 하였더니 과연 여우가 책을 가져다주었다. 약속대로 여우를 풀어주고 책을 살펴보니 도술에 관한 비결서였다.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 경면주사로 점을 찍어가며 수십 가지로 보았는데 어느 날 전우치의 본댁 노비가 머리를 풀고 통곡하며 찾아와 그의 부친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우치가 놀라 책을 방바닥에 버려둔 채 문 밖으로 뛰어나가 보니 갑자기 노비가 간 곳이 없었다. 그제서야 여우에게 속은 것을 알고 방으로 들어가 보니 여우가 이미 주사로 점을 찍은 부분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조리 베어가 버린 후였다.
우치는 후에 도술로써 세상에 크게 이름을 떨쳤는데 모두 주사로 점을 찍은 내용의 술법을 주로 사용하였다. 실제로 가정연간(1522~1566)중에 전염병이 크게 만연되었는데 전우치가 도술로써 그 역질을 예방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볼 때 그의 전기를 단순히 소설같은 이야기로만 치부할 수 없게 하고 있다.
이수광(1563~1566)도 <지봉유설>에서 "전우치는 시중의 유생으로 도술을 잘하고 재주가 많으며 능히 귀신을 부렸다."라고 서술하며 전우치가 지은 "청창유월매삼매 벽락무운안육통(淸窓有月梅三昧 碧落無雲雁六通)"이란 한시를 소개하고 "참으로 도를 얻은 사람 같다."라고 평하고 있다.
그 밖에 전우치에 대한 신비한 일화가 여러 문헌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그 중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나오는 이야기가 무척 흥미롭다. 여기에는 그 당시의 저명했던 선비들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
전우치는 방술가이나 문장 또한 능했다. 한 번은 기제 신광한(1484~1555)의 집에 갔었는데 마침 송인수(1487~1547)도 와 있었다. 기제가 인수를 돌아보며 '이름을 들었지만 이렇게 서로 만남이 늦은 것이 한스럽소.'하였다. 기제가 '전우치군, 자네 이 분을 위해 재미있는 것을 한 번 보여줄 수 없는가?'하니 우치가 웃으면서 '무슨 재미있는 일이 있어야지요.'하였다. 조금 있으니 주인집에서 점심밥을 내왔다. 우치가 밥을 먹다가 뜰을 향하여 입속에 밥을 내뱉으니 밥알이 모두 흰 나비가 되어 편편히 날아가는 것이었다.
또 일찍이 어느 친구 집에 갔더니, 좌중에 있던 어느 사람이 '자네 천도복숭아를 얻어 올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전우치가 '무엇이 어렵겠는가?'하고는 새끼줄 수백 발을 가져오라 하였다. 새끼줄이 점점 풀려 하늘 높이 올라가더니 나중에는 구름 속에서 대롱대롱 땅에 늘어졌다. 그러자 전우치는 동자의 허리를 새끼줄 끝에 매달고 동자에게 줄을 타고 올라가라고 하면서 '새끼줄을 타고 올라가면 그곳에 푸른 복숭아가 많이 열려 있을 터이니 따서 내려 보내라.'고 하였다. 이에 좌중에 사람들이 모두 밖으로 나와 하늘을 쳐다보았다. 동자는 새끼줄에 매달려 공중으로 올라가더니 구름 속으로 들어가 안 보이게 되었다. 한참 뒤에 푸른 복숭아가 잎이 달린 채 마당에 마구 떨어졌다. 사람들이 다투어 맛을 보니 단물이 흠뻑 흐르고 맛이 이세상의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공중에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전우치가 깜짝 놀라 하는 말이 '복숭아 하나를 먹으려다 어린 동자의 목숨을 잃었구나.'하였다. 좌중의 사람들이 연유를 물으니, '이건 틀림없이 천도를 지키는 신장이 동자를 죽인 것 같다'라고 하였다. 갑자기 공중에서 팔뚝 하나가 땅에 툭 떨어지더니 잇달아 두 다리, 몸뚱이, 머리가 따로따로 계속 떨어졌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소스라치게 놀라 안색이 변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전우치가 천천히 팔, 다리, 머리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서 사지를 한 자리에 수습해서 원래의 모습대로 맞추어 놓자 잠시 후에 동자가 부스스 일어나더니 뛰어 달아나는 것이 아닌가?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사람들이 서로 쳐다보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전우치는 이러한 환술에 한 방사로서 뿐만 아니라 정통 선법을 익힌 시해선의 모습도 보여주고 있다.
훗날 전우치는 황해도 신천에서 술수로써 민중을 현혹시킨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옥에서 죽었다. 태수가 사람을 시켜 파묻게 했는데 후에 친척들이 이장하려고 무덤을 파서 관을 열어보니 속이 텅 비어 있었다.
그런데 <오산설림>의 저자 차천로(1556~1615)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기록에 남겨두고 있다.
어느 날 전우치가 찾아와서 부친에게 <두공부시집> 한 질을 빌려 달라고 해서, 그 사람이 죽은 줄 모르고 빌려주었는데 그 후에 알아본즉, 벌써 죽은 지가 오래되었다.
이상 살펴본 바에 의하면 전우치는 실존했을 가능성이 크나, 그의 도술이나 신통력에 대해서는 상당부분 가공이 많았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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