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대가 마감하는 때는 여러 가지로 혼란이 겹쳐 그런 시대를 살아가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나라를 빼앗긴 설움 속에서도 시대의 등불이 되고자 사대부로서의 기풍을 잃지 않고 위민행정의 모범을 보이며 살다 간 우리 담양의 인물이 있으니 바로 야은 전녹생이라는 분이다.
야은 선생은 고려말 원나라 간섭의 막바지 시대를 살다간 인물로 충숙왕 5년인 1318년에 담양부 북쪽에 있는 경대산의 원율천이 흐르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자는 맹경(孟耕), 호는 야은(埜隱), 시호는 문명공(文明公)이다.
대대로 담양의 호장직을 승계하여 왔던 담양전씨 가문은 충렬왕 원년(1275) 10월에 전득시가 문과에 장원을 함으로써 중앙정계로 진출하였고 담양군으로 봉해지게 된다. 이런 계기로 담양을 관향으로 하는 전씨의 시조가 되었는데 야은은 시조공의 7대손에 해당된다.
그의 집안을 보면 관직이 부사에 이른 전득시를 이어, 그의 5대조인 지존은 판전교시사 진현관 직제학을 지냈고 고조인 승윤은 지도평의를 지냈으며, 증조인 공일은 지간의대부였고 조부인 영은 판사복시사를 지냈다.
그의 아버지 희경은 사인을 거쳐 조봉랑 지영주사를 지냈으며 뒤에 봉익대부 밀직부사로 증직되었다. 어머니는 장사감무를 지낸 웅진서씨 성윤의 딸이다. 이들 사이에서 이른바 전씨 삼은이 태어났으니 맏이 야은이오, 가운데가 삼사좌윤을 지낸 뇌은 귀생이며, 막내가 공조전서를 지낸 경은 조생이다. 이들 삼은 선생을 기리는 비가 담양읍 향교리 향교입구에 지금도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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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안(?~1368)의 사우명행록에 의하면 야은은 5세 때 이미 책을 읽고 문장을 지을 줄 알았으며 8세 때 영분송이라는 시를 지어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고 한다. 충혜왕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제주사록에 보임되었다. 제주사록을 역임한 뒤에는 조정에 들어가 전교시 교감이 되었다.
1347년(충목왕3)에는 전교시 교감으로서 정치도감관이 되어 당시의 권호들을 다스릴 방안을 강구하던 중, 고려인으로 원나라 황제의 비가 된 기황후의 족제 기삼만을 잡아다 죄를 다스렸다. 곤장을 맞아 기삼만이 죽게 되자, 행성 이문소에서 야은과 좌랑 서호 등을 가두었다. 그해 10월에 원나라에서는 기삼만이 죽은 일로써 직성사인 승가노를 보내어 정치관인 야은을 비롯하여 백문보, 신군평, 서호 등 10여인을 곤장으로 다스렸다.
1350년 9월에 야은은 정동향시에 합격하였으나 권호들의 훼방으로 원나라 제과에는 응시할 수 없었다.
1357년(공민왕6)에는 기거사인으로 간의 이색, 사간 이보림, 정추 등과 더불어 염철별감의 폐단을 논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 뒤 전중시어사가 되었고 이 무렵 계림판관을 지낸다.
1361년 봄에 사간으로서 전라도 안렴사로 나갔는데, 5월에 왜구를 방어하는데 있어서의 폐단을 조정에 아뢰었다. 이 해 동짓달에 홍건적이 쳐내려 와 공민왕이 남쪽으로 파천하니 시어사로 이색 등과 더불어 어가를 호종하였다.
그 뒤 중서사인지제고가 되었다가 이듬해인 1362년 봄에 관제가 바뀜에 따라 내서사인이 되었다. 홍건적의 난 때 호종한 공으로 상을 받고 여러 관직을 거쳐 좌상시에 이르렀다. 1366년에 수빙사로 원나라의 절동지방에 갔다가 이듬해 6월에 돌아왔다. 그해 동짓달에 감찰대부가 되었다.
1365년 2월에 노국공주가 임신한지 10삭이 되자 야은과 이무방을 사면하였다. 같은 해 4월에 감찰대부로서 원에 들어가 황태자와 곽확첨목아, 심왕 등에게 예물을 바쳤다. 그 달에 밀직제학이 되었다. 7월에는 계림윤이 되었다.
1366년 다시 밀직제학으로 하남왕 곽확첩목아에게 사신으로 갔으나 황태자의 방해로 하남에 이르지 못하고 연경에 머물다가 6월에 돌아왔다. 이듬 해 7월에 경상도도순문사로 합포(지금의 마산)에 출진하였다.
이 때 일찍이 원에서 구해온 고문진보를 깎고 보태어서 처음으로 간행하였다. 고문진보는 중국 송나라 학자 황견(黃堅)이 편찬한 역대의 시문(詩文)과 선집(選集)인데 1366년 3월부터 6월까지 연경에 사신으로 가 있으면서 구입해 온 고문진보를 보급하고자 인쇄하여 간행하였다. 당시 간행된 고문진보는 전해지지 않으나 후세에 강회중과 김종직은 최초로 고문진보를 발행한 사람은 야은 전녹생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정당문학(고려시대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종2품 관직. 정원은 1명이고, 품계는 종2품으로 정해졌다. 국가정무를 관장하는 재부(宰府) 속하는 관직)이 되었고 1371년 3월에 동지공거로서 지공거 이색과 함께 김잠 등 31인을 대신하여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다.
1373년 다시 정당문학이 되어 강령부원대군(뒤의 우왕)의 사부가 되었다. 같은 해 서북면도순문사 겸 평양윤이 되었다. 이 해 섣달에 충혜왕의 얼자라고 일컫는 승려 석기가 평양에서 반란을 모의하므로 서해도도순문사 김유와 함께 잡아서 목을 베었다.
1374년 3월에 왜구가 노략질을 하므로 왕이 최영으로 하여금 경상전라양광도도순문사를 삼으니 헌사에서 최영을 탄핵하여 반대하므로, 4월에 판개성부사로 있던 야은을 다시 경상도도순문사로 삼았다. 이 무렵 추충찬화보리공신(推忠贊化輔理功臣)의 호를 받았으며, 예문관 대제학 지춘추관사에 오른 듯하고 직계가 광정대부에 이르렀다.
그가 쓴 글을 후손인 전만영이 영조6년(1730년)에 여러 문헌에서 모아 간행한 야은일고가 오늘날 전하고 있다. 이 문집에는 전녹생이 지은 시 9편과 비답과 계사 각 1편, 상소문 2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 빠진 것으로 동문선에 실려 있는 시 2편을 합하면 시 11편과 기타 몇 편의 문장이 그의 것으로 전하는 자료의 전부다.
그가 남긴 글에서 그의 사상과 철학, 관리로서의 가치관을 여실히 엿볼 수 있는데 대표적인 그의 시를 보면,
경상 안찰사로 가는 정부령 우를 전송하며 (東文選 7권)
君看種樹槖駝傳(군간종수탁타전) 그대 보았지 종수탁타전의 나무 심는 법에
移之官理可養人(이지관리가양인) 정치에 옮기면 백성 기를 수 있다는 말을
解道安民在無事(해도안민재무사) 백성을 편안히 하려면 일을 꾸미지 말아야 한다는
牧隱詩語醇저眞(목은시어순저진) 목은의 시도 순진한 말이다.
古人今人意不遠(고인금인의불원) 옛사람과 지금 사람의 뜻은 서로 같으나
蓋傷世法多立新(개상세법다립신) 세상 법령 새로 많이 만들어지는 것 탄식한 것이다.
況今時勢如理絲(황금시세여리사) 하물며 지금 시세는 실 가리기와 같아서
欲速環自成紛繽(욕속환자성분빈) 빨리 서둘수록 도리어 헝클어지기만 하나니
願言爲事務從簡(원언위사무종간) 원컨데 그대는 일을 간소하기에 힘써서
勿使一牽加諸民(물사일견가제민) 털끝만큼이라도 백성에게 부담을 주지 말아라.
鄭君共稱慷慨士(정군공칭강계사) 남들은 정군을 강개한 선비라 일컫는다.
世微鄭君吾誰親(세미정군오수친) 세상에 정군 아닌들 내 누구와 친할고
傷心豈獨惜離別(상심기독석이별) 상심함이 어찌 이별을 애처로 와서 뿐이랴
南望不覽沾衣巾(남망불람첨의건) 남쪽을 바라보니 나도 모르게 옷깃이 젖어간다.
1367년(공민왕 16년) 봄 경상도 안찰사로 나가는 정우라는 친구를 전송하며 지은 전녹생 선생의 시다.
이 글에 나오는 곽탁타는 당나라의 유명한 대문장가 유종원의 글에 나오는 사람으로 나무 심는 것을 업으로 하는 인물이다. 그는 나무를 심고 가꾸는데 있어 귀재였다. 유종원은 그 비결을 알고 싶어 곽탁타에게 물었다. 곽탁타는 “내가 능히 나무로 하여금 오래 살고 번성하게 하는 것이 아니오, 능히 나무의 본성에 따라서 그 성질에 이르도록 할 따름”이라고 대답하면서 또한 다른 이들이 나무 가꾸는 일에 실패하는 이유를, “뿌리를 굽히고 흙을 갈아주며 북 도는 것도 지나치게 하지 않으면 모자라게 한다.”고 지적하였다.
이 말은 나무가 제 본성에 따라 살도록 하지 않고 나무를 키우는 자가 마치 나무를 몹시 아끼고 사랑하는 듯 하면서 오히려 방해를 한다는 것이다. 이른 바 조정의 폐해를 날카롭게 지적한 말이다.(유종원의 종수곽탁타전(種樹郭槖駝傳) 고문진보 후집 권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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